아이들이란 쭉쭉 줄기를 뻗는 고구마순처럼 그렇게 아무 근심 없이 자라나다가도 어느 날 덜컥 아프고 만다. 일 년이 가도 감기 한번 없던 딸아이가 열감기를 앓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걱정스러우리만치 기침이 깊어졌다.
기침이 멎지 않는 아이를 위해 배숙을 끓여낸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모른다. 요즘 같아선 환아를 돌보는 의료인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문을 닫는 소아과도 많다는 말들을 심심찮게 듣어온 터라, 붐비는 소아과에 가서 긴 줄을 서느니 아이를 집안에 차분히 머물게 하며 감기가 지나가길 기다리자고 마음먹었다.
기침이 깊어진 아이를 위해 배숙을 달였다
'뭉근하게 끓이다'라는 표현이 배숙에 만큼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을까. 배 하나를 통째로 중약불에서 익히기를 60분, 배 꼭지 부근 둥글게 칼집을 그려 만든 뚜껑을 가만히 열었다. 간절하던 배즙이 속에 넣은 꿀, 생강, 대추 진액과 함께 진하게 우러나 배를 감싼 그릇으로 흥건히 빠져나와 있었다.
잘게 썬 과육을 송송 들어뜨린 배숙 한 대접을 아이 앞으로 내밀었다.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국물을 호호 불어대느라 한껏 오므린 아이의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숟가락을 야물게 쥔 작고 하얀 손이, 낮잠에서 깨어난 그대로 늘어뜨린 흑단의 윤기 나는 머릿결이 신비로웠다. 매일 곁에 두고 지내는 혈육이건만 딸아이의 모든 자태와 몸짓 하나하나가 새삼스레 빛나고 있었다.
"엄마, 무슨 기침약이 이렇게 달콤해?"
배숙을 달게 뜨는 아이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 보였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와 종일 집안에서 꽁냥꽁냥 시간을 보낸 게 대체 언제였던가. 무엇에 비할 바 없이 애틋한 '지금 이 순간'이었다. 다양한 교육적 경험을 위한답시고 이 작은 아이를 얼마나 많은 시간 집밖으로 -학교로 또 학원으로- 내몰고 있었는지를 나는 아픈 가슴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아픈 아이를 품은 집이 마냥 평화로울 수는 없었다. 기침이 거의 멎었다 생각하고 샤워를 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머리를 말리고 자리에 누운 아이의 동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이가 잠에 들라치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발작적인 기침이 터져 나왔고, 불안해진 위장은 펌프질을 하며 그에 장단을 맞췄다. 아이의 목구멍을 뚫고 올라오는 가래 뭉텅이와 함께 위장을 미처 통과하지 못한 음식물이 와락와락 게워졌다. 그러고도 이 야속한 폐부는 무슨 미련이라도 남은 마냥 끝없이 으르렁대며 이 가여운 아이를 잠 못 들게 했다.
아이는 기침과 함께 구역질을 하느라 숨이 가빴다. 제대로 숨을 들이쉴 수도, 내쉴 수도 없어 괴로워했다. 나는 크게 당황하고 긴장한 탓에 허리가 바짝 조이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성을 붙들려 안간힘을 쓰며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 시간에 소아과선생님 계시나요?"
"오늘은 소아과 선생님 휴무이십니다."
"아, 그래요......"
"혹 아이 진료 보실 거면 소아과 의료진이 있는 다른 병원 찾아가 보세요."
아이가 몸부림치는 30분의 시간이 내게는 끝나지 않을 재앙의 시간이었다. 이 일을 어찌할꼬 허둥대며 아이 살릴 길을 모색하는데 아이가 돌연 죽은 듯 잠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귀를 아이 코끝에 가져가 보았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찌글찌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숨에 불안과 동요가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이럴 수도 있는가? 말 그대로 아이는 색색 자고 있었다.
빠져나가야 할 나쁜 기운을 모조리 뱉어낸 몸이 요동치기를 완전히 멈춘 것인가. 그때서야 나는 집안에 감도는 야릇한 기운을 감지해 냈다. 여동생 옆에서 잠든 아들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잠귀가 밝은 편인데 신기하리만치 그날은 깨지 않고 잠을 잘 잤다. 아이의 아빠란 사람은 또 어떤가. 그가 몸을 뉘인 곳은 태풍의 눈임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약기운에 곯아떨어졌다지만, 조금 과장해 딸이 생사를 오가는 상황 중에 그는 아랑곳없이 곤히 잘 수 있는가.
힘겹게 맞이한 아침, 지난밤의 이야기를 식구들에게 풀어놓았다. 남편과 아들은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알 수 없는 일은 딸아이조차 "누가? 내가 그랬다고요? 엄마, 나 푹 잤는데?"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족들은 모두 "엄마가 꿈을 꾼 게 아니냐"며 정색했다. 지난밤의 사연을 믿어준 건 애청하는 라디오 프로의 DJ 김정원님 뿐이었다. 짧게 보낸 사연에 '아이가 밤새 아팠던 모양인데 어머님이 한잠도 못 주무셨겠다'는 위로의 멘트와 함께 커피 쿠폰 한 장을 보내주셨다.
결코 꿈일 리가 없는 것이다. 토사물을 받아낸 휴지뭉치와 코와 가래로 얼룩진 이불이 집안에 산만큼 쌓여 있는데. 그렇게나 처절했던 지난밤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다만 꿈 아닌 '꿈같은 날들'이었음은 분명하다. 딸아이와 밀착하여 보낸 하루, 또 하루가 말이다. 아이는 엄마의 다정한 품이 못내 그리워 그렇게 몸살을 했던 걸까? 결국 배숙을 받아마시며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머금은 몸은 스스로 고비를 넘겨가며 회복할 길을 찾아 나선 것이리라.
아이의 잔기침이 말끔히 사라지도록 나는 매일매일 배숙을 달이며 내 품의 아이를 꼭 안아줄 것이다. 돌고 돌아 마침내, 배숙이다.
태풍 뒤 맑게 갠 하늘처럼 다시 찾은 소중한 일상이다. 오늘 아침에 받아 든 쿠폰을 들고 가 짬을 내어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다면 이보다 과분한 일상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