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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혜의 뜨거운 맛

식혜, 내가 가진 사랑의 언어

by 서지현

2023. 1.5. 목요일, 식혜의 뜨거운 맛



식구들이 아직 단잠에 취한 시간, 식혜가 8시간의 긴 발효를 마쳤다. 밥솥 뚜껑을 열자 진한 단내가 뜨거운 김과 함께 훅 끼쳐 오른다. 밤새 삭아 가벼워진 수많은 밥알이 둥실 떠올라 밥솥 아귀를 가득 메우고 있다.



나는 밥솥의 기능을 보온에서 취사로 돌렸다. 다 된 식혜를 한소끔 끓여내기 위해서다. 맛을 돋우기 위해 생강편 반 주먹도 착실히 들어뜨렸다. 국자와 국대접 하나를 챙겨 와 밥솥 곁에 자리를 잡았다. 차분히 기다리자니 밥솥 한쪽 가장자리에서 밥알 뭉치가 봉긋하게 솟아오른다. 하얀 거품이 몽글몽글 피어나더니 얼마 안 가 보글 끓는다. 그 모양이 활화산, 어쩌면 작은 간헐천 같다고 생각했다. 떠오른 거품을 살뜰히 걷어냈다. 곧 다른 편 식혜가 같은 양상으로 끓어오르며 거품을 토한다. 거품이 피어나는 족족 손을 놀리다 보니 부옇던 식혜물이 맑게 갠다. 거무스름하던 밥알도 한결 뽀얘진다. 마침내 아침 동이 튼다.



한잠에 빠져있던 식구들이 하나 둘 깨어난다. 성가신 알람음이나 창으로 비켜드는 햇살 한 줌 없어도 집안 곳곳 요동치는 진한 단내에 번쩍 눈들을 뜬다. 남편이나 아이들이나 짜증 한소끔 없이 기분 좋게 잠자리를 빠져나오는 모습이 마치 신비한 주문에 걸린 이들 같아 웃음이 난다. 이만하면 작전 대 성공. 나라는 착한 마녀는 다음날 동틀 무렵 식혜가 완성되도록 일부러 시간을 계산해 엿기름물을 잡아 놓았던 것이다.



식구들은 잠이 덜 깨 흐릿한 눈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한 상에 둘러앉는다. 살얼음 동동 띄운 식혜의 시원한 맛도 일품이지만, 그것이 어디 발발 끓어 오른 식혜의 뜨거운 맛에 비할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후후 호호 입바람을 불어댄다. 달고 뜨거운 국물이 목젖을 타고 내려가 심장을 달군다. 저 깊이 단전으로부터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난다. 부디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해를 뜨겁게 살아낼 수 있기를. 막 끓어 나온 식혜물처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2023. 1. 23. 월요일, 그래서 더욱 귀한 맛


설 명절, 대식구가 우리 집에 모였다. 전날 밤 나는 큰맘 먹고 식혜를 한솥 만들어 두었다. 가족들과 식혜 한 그릇씩 기분 좋게 나누어 먹는데 조카가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저는 식혜가 꼭 요구르트에 밥 말아먹는 기분이라서요."

그러자 형님마저 짓궂게 웃으며,

"어쩜, 나도 똑같은 생각이라 식혜 안 먹는데..." 라며 비호감을 밝혔다.



세상에나, 식혜를 싫어하는 사람이 다 있다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식혜를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것은 나의 완벽한 오해요, 편견이었다. 아마도 어릴 적에 먹던 식혜가 명절이나 손님 오시는 날과 같이 경사스러운 날에만 맛보던 귀한 음료라 그랬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언젠가 친정엄마께 '이토록 맛 좋은 식혜를 어찌 설, 추석에만 만들었느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그때는 밥 먹을 쌀조차 귀해서'였다. 그럼에도 요즘같이 쌀값이 헐고, 밥이 온갖 음식에 밀려 대우받지 못하는 시대에도 손수 식혜 만드는 가정을 보기 힘든 이유란 뭘까? 아무래도 품과 시간이 많이 드는 탓이리라.



그래서 더더욱 값나가는 음식이 아닌 걸까? 자판기에 동전 몇 개 흘려 넣고 버튼만 꾹 누르면 뚝딱 떨어지는 그런 음료가 아니라서. 기다림의 미덕을 배울 수 있는 음식이라서. 긴 기다림 끝에 맛보는 식혜의 단맛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맛이라서.





2023. 5.16. 식혜, 내가 가진 사랑의 언어


우리 집에서는 식혜의 위상이 높다. 식혜가 주식(밥)도 되고 부식(음료)도 될 정도로 가족 모두 식혜 사랑이 끔찍하다.



식혜는 내가 가진 사랑의 언어다. 식구들을 각별히 챙겨주고 싶을 땐 식혜를 만든다. 남편의 장거리 출장을 앞두고 식혜를 끓였다. 며칠 못 본다는 서운한 마음에 하루 이틀 든든히 식혜라도 먹여 떠나보내자 생각했다.



아침부터 식탁에 모여 앉아 식혜 타임을 하는데 남편이 아이들에게 간곡한 당부의 말을 했다.

"어린이들은 1일 1 식혜만 하세요. 알았지?"

"아니~ 우리는 1일 3 식혜 할 건데요? 아빠는 출근하면 1일 2 식혜밖에 못 하지요?"

"어허, 그럼 못써요. 어린이들은 '퐁당퐁당' 해야 해요."

"싫은데요, 우리는 '첨벙첨벙' 할 건데요."

두 아이가 연신 히죽거리며 아빠 말을 능수능란하게 받아친다. 이렇게나 유치하고도 진지한 대화라니, 그것도 고작 식혜를 사이에 두고. 그 순간 나는 슬쩍 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걱정 마요, 어린이들. 아빠 곧 출장 가면 1일 2 식혜는커녕 한 잔도 못 마셔요. 남은 식혜 다 어린이들 거예요."

라고 말하며 아이들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순간 남편 얼굴에 황망함이 스치더니 어둠의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어린이들의 완벽한 '승'이었다.




2023. 5. 19. 금요일, 식혜밥 쿠키를 굽다



설탕 한 스푼 넣지 않고도 달콤한 식혜를 만드는 비결이라면 쌀도, 엿기름도 넉넉히 쓰는 것이다. 다만 이런 경우 뒤에 가서 남아도는 식혜 밥알이 처치곤란이다.



고민 끝에 식혜밥으로 쿠키를 구웠다. 식혜밥의 물기를 꾹 짜낸 것에 밀가루와 콩가루 몇 스푼, 땅콩 분태와 유채유를 더해 반죽을 했다. 소금과 설탕은 양심껏 넣었다.



170도씨 낮은 온도의 오븐에서 40분간 느긋하게 구워냈다. 제형이 나쁘지 않고 건강한 단맛이 나는 쿠키가 완성되었다. 날이 좋아서였을까? 창 너머로 아이들 노는 소리가 왁자하다. 이걸 아이들이 먹어 줄까? 차마 놀이터에 들고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 혼자만의 티타임을 가졌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아이들 이유식의 시작도 쌀미음이었는데. 쌀로 만든 음식은 음료든 쿠키든 일단은 안심하고 보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인 듯하다. 한국인은 밥심이라 그랬다. 그리고 식혜가 건강의 뒷문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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