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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의 밑반찬

그건 나의 진심이었어

by 서지현

장을 보고 돌아와 현관문 앞에 섰다. ‘삐삐삐삐-’ 두 번째 손가락이 손에 익은 숫자 네 개를 거침없이 누른다. ‘띤도디-’ 귀에 익은 짧은 음이 경쾌하게 울리고 철컹 문이 열린다. 콧잔등이 시큰해 오더니 가슴속이 텅 빈다. 내가 보낸 하루가 영락없이 구태의연하게 틀어박힌 우리 집 현관문 비번만 같아서. 조금도 새로울 바 없이 언제나의 관성대로 흘러간 것만 같아서. 문득 뒤를 보니 낮동안의 맑고 싱싱하던 해가 슬픈 오렌지색 낯빛을 하고 서쪽으로 기울 채비를 한다.



오후 4시는 하루 중 감정적으로 가장 넘어서기 힘든 시간대다. 여간 녹록지 않은 날로 수요일을 일컫는 말인 ‘Hump day’에 빗대자면 ‘Hump hour’쯤 될 것이다. 하루를 견디고 견디다 끝내 마땅한 출구를 찾지 못한 감정이 와르르 쏟길 것만 같아 나는 울상이다.



헝크러진 집안을 겨우 원상태로 돌리는데만도 유독 큰 힘이 들었던 하루였다. 수북한 빨랫감, 쌓인 설거지, 바닥에 멋대로 흩어진 물건들, 어느 것 하나 손을 타지 않는 일이란 없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서서 종종댔는데 눈에 띄는 성과란 보이지 않고 결국 제자리걸음인 것이 살짝 서럽기까지 했다.




장바구니를 식탁 위에 탁 떨어뜨리니 다시 눈앞 현실이다. 제아무리 고상한 고민이라도 당장에 밥상차릴 일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감정을 추스르고 새 찬을 만들기로 했다. 요즘 같아선 첫째 아이의 밥 먹는 습관이 고민이다. 아무리 일러주어도 빨리 먹는 습관이 나아지지 않는다. 결국 고민은 돌고 돌아 밑반찬을 고루 놓아 먹여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한 그릇 음식은 만들기야 수월하지만 먹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속도가 붙는 법이니까.




남아 있는 힘을 끌어모아 서리태콩을 간장에 조리고 시금치를 데치고 콩나물을 무쳤다. 콩나물은 양이 많아 하얗게, 또 빨갛게도 무쳐냈다. 양념에 막 버무려진 찬을 일정한 사각 찬통에 담고 한 김 흘려보낸 후 뚜껑을 닫았다. 순식간에 뽀얀 김이 서린다. 그 모양이 어찌나 고운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미혼 시절부터 아껴오던 은귀걸이나 진갈색 숄더백, 핏이 산 청바지보다도 사랑스러운 자태였다.



찬통에 서린 김은 우리들 마음의 온도차였을까? 허기 끝 식탁을 마주한 식구들은 더럭 찬통 뚜껑을 열어젖힌다. 새 음식을 맛보고 간을 음미하며 오직 배를 채우는 일에 열중해 있다. 이 반찬, 저 반찬을 바삐 오가는 몇 벌의 젓가락 사이로 누군가의 수고는 안중에 없다. 이 작은 찬통 몇 개를 채운답시고 긴 시간 주방을 지킨 이의 수고로움 따위는 잠시 잊힌 듯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야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찬통에 서린 김이 반찬 맛에 큰 영향을 안 주듯 밥 차린 수고쯤 몰라줘도 애초 이들을 향한 나의 애틋함이 식을 리 없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가족들에게 따끈한 한 끼 먹이자고 새 찬을 만들 떄의 진심, 바로 그 투명한 마음일 것이다. 잘 비워낸 찬통에 새 찬을 담기 위해 나는 잔반을 그러모아 오늘 점심을 해결했었다. 반찬을 다 만든 후엔 어서 뜨끈한 밥에 새 찬을 놓아 먹이고 싶어 마음이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누군가를 지어 먹이는 매일의 신성한 주부 노릇이 그날의 한숨과 우울을 물리친다. 살림을 살며 완벽할 순 없어도 적어도 몇 가지 일에만은 마음을 다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진심을 스스로 알아채는 것으로 이 녹록지 않은삶을 지속할 힘이 얻는다.



노을 비끼는 오후 4시, 기로에 선 위기의 주부는 그렇게 또 한번 위태한 하루를 넘긴다. 지금 내가 발 붙이고 서 있는 주방과 집안 곳곳에 혹 더 많은 나의 진심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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