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활용품 끝까지 쓰기

보물찾기 하듯 살림을 산다

by 서지현
*-

살림을 살면서 별 것 아닌 일로 보람을 얻는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나 얼마간의 위안과 만족이 되는 모종의 기쁨이 있다. 이것은 완전히 비워낼수록 충만해지는 기쁨, 그 비밀스러움에 관한 이야기다.



핸드크림을 끝까지 쓴다. 손으로 짜서 더 이상 내용물이 안 나온다 싶으면 커터칼로 배를 가른다. 튜브 가장자리와 입구 부근에는 상당한 양의 크림이 고여 있다. 한 번에 콩알만큼 찍어 쓰면 네댓 번은 쓸만큼 넉넉한 양이다. 크림은 공기에 노출되어도 잘 굳지 않아 그대로 두고 쓴다. 물건을 완전히 비워내는 과정에서 누리는 즐거움에 더해 소비를 당분간 연장시 수 있으니 보람이 크다.



마침내 핸드크림을 완전히 비워낸 날, 이게 다 뭐라고 뿌듯하고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지. 커다란 희열마저 느낀다고 하면 무슨 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과장된 마음이 아니다. 아는 사람은 알리라. 이 작고 사소한 일이 건조한 살림과 일상에 건네는 커다란 활력과 새 기운을 말이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아침, 치약마저 속시원히 나오지 않는 순간의 답답함을 아는가. 요령 없는 아이들이 "엄마, 치약이 짜도 안 나와" 하고 울상을 지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내미는 일이 꽤 성가시게 느껴진다. 차라리 웬만큼 치약을 썼다고 생각했을 때 새 치약을 내는 편이 속이 편하다. 치약의 마지막을 책임지는 일을 온전히 나의 몫으로 남겨두고 보는 것이다.



치약 봉합선을 따라 커터칼로 배를 가르면 투명하고 끈적한 내용물이 훤히 드러난다. 핸드크림과 마찬가지로 몇 번이고 쓸 수 있는 양이지만 치약은 얼마 안 가 굳기에 즉시 쓸모를 도모해야 한다. 나는 발라낸 치약으로 종종 세제를 만들어 쓴다. 작은 볼에 물을 받고 튜브 안쪽에 물에 적셔가며 칫솔로 꼼꼼히 닦아낸다. 쓰다만 치약 두어 개만 털어도 쌀뜨물같이 뽀얀 액체 세제를 얻을 수 있다.


치약 세제는 통에 담아두고 욕실 청소에 활용한다. 덕분에 여태 욕실 세제를 따로 사 쓴 기억이 없다. 사용하고 어설프게 남은 샴푸나 린스, 치약, 여행용 키트에 들어 있는 바디워시 등을 세제 대용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치약이야말로 제일의 효용을 자랑하는 물건이다. 치약은 세정뿐 아니라 표백, 살균 효과까지 있어 욕실 청소에 탁월하다. 수전, 변기, 타일, 바닥 등에 치약물을 휘휘 흩뿌려 닦으면 뽀득뽀득 광이 나고 상쾌한 향이 풍긴다.




내가 꾸려나가는 살림이 겉은 화려하지 않아도 뒤가 아름다운 모양새였으면 한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어느 오랜 구호를 수줍게 떠올리며 오늘도 나는 수명이 다한 물건에게로 마음이 기운다. 다 쓴 물건, 그것의 새 쓰임을 도모하느라 한참을 고민한다. 값이 많이 나가든 그렇지 않든 애초 최고의 상품가치를 입고 우리 집에, 또 내 손에 도달한 생활용품들이 아니던가. 그것들이 끝까지 제 소임을 다하도록 뒤를 봐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해 온 동반자(혹은 동반물)에게 최소한의 격을 부여하는 일일 것이다.



손바닥만 한 핸드크림과 두 개의 치약을 완전히 비운 대가로 반짝이는 기쁨을 돌려받은 날이었다. 아무도 몰라주는 혼자의 애씀이기에 그로 인한 대가도 오롯이 혼자의 것이다. 새로 구입한 생필품의 포장을 열어 제 위치를 찾아주는 일이 더없이 설레는 까닭은 앞선 물건을 말끔히 비워낸 때문이리라.



재생의 가치를 품은 물건이 집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어쩌면 어린 아이의 눈에만 영롱한 빛으로 반짝이는 조개껍데기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고보면 살림은 일종의 보물 찾기일런지 모른다. 기대를 품고 보물찾기 놀이에 나선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오늘도 살림 구석구석을 살핀다. 어디 수명이 다 되어 가는 물건은 없는지, 살리는 손길을 기다리는 절박한 존재가 없는지를. 때마다 나는 비장한 심정이 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