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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Mar 16. 2024

타다 만 커피

나의 믹스 취향

길쭉한 믹스 커피 한 봉을 뜨겁게 달구어진 컵에 탁 털어넣는다. 진갈색 알갱이 위로 뽀얀 가루가 소복이 쌓인다. 동시에 내 안의 양심이 발동을 시작한다. 프림이 몸에 안 좋다잖아. 게다가 달달구리를 입에 달고 사는데 커피에 굳이 설탕까지? 할 수 없이 티스푼으로 하얀 가루를 떠올린다. 자칫 입자 고운 원두 알갱이가 타격을 입을 수 있으므로 최대한 신중을 기해 세심히. 반쯤 걷어내는데 성공했다면 충분하다. 보통은 그정도가 최선이니까.    



한바탕 끓은 물을 커피 위로 쪼르륵 붓는다. 믹스 한 잔 분량에 꼭 맞는 작고 아담한 잔이 순식간에 봉긋하게 차오른다. 이 잔은 친정엄마 이사 치르도굴하다시피 건져올린 아주 귀한 잔이다. 바닥면을 들춰보니 무궁화 로고와 함께 '1942 Stoneware 행남사' 라는 글귀가 보이고, 그 옛날 공산품의 대표적 품질 보증 마크였던 '품'자가 든든히 새겨져 있다.



뜨거운 물 세례를 받은 커피가 단내를 풍기기 시작한다. 향긋한 원두가 프림, 설탕과 버무려지며 만들어 내는 기분 좋은 단내다. 미처 걷어내지 못한 하얀 가루가 단박에 부글거리며 영락없는 크레마 형상을 연출한다. 비로소 나는 티스푼으로 두어 번 가볍게 커피를 젓는다. 문자 그대로 '두어 번'일 뿐이다. 그러니까 알갱이 원두가 위로 떠올라 녹을듯 말듯 망설일 정도로만 매우 가볍게.

 


한 지인에게 내 식대로의 믹스커피를 만들어 건넸더니 예상했던 식의 돌직구가 날아왔다.

"커피 이렇게 타면 어른들은 '타다 만 커피'라고 한 마디씩 해."

"알아. 근데 편견을 버리고 한번 맛봐 봐. 원두 맛이 훨씬 잘 느껴져. 부드러운 커피 베이스 위로 녹을 듯 말듯, 원두 풍미가 확 올라온다니까."



노련한 손놀림으로 원두와 설탕, 프림이 혼연일체 된 커피라야 믹스커피의 자격이 되는 걸까. 믹스가 될듯 말듯한 상태, 그러니까 세 가지 재료가 적당히 믹스된 커피의 맛을 궁금해 하신 적은 없는가. 나는 할 수 없는 경우, 그러니까 어쩌다 한번씩 믹스 커피를 타는데, 그 순간마저도 원두의 고유한 맛을 놓치지 않으려 나름 몸부림을 친다.



믹스 커피는 뭐니뭐니해도 '남타커(남이 타준 커피)'가 제일이라는데, 나는 아무래도 '타다 만 커피'가 좋다. 믹스를 타기에 앞서 생각 없이, 늘 하던대로, 티스푼으로 세차게 커피를 저어 알갱이말끔히 녹이는 게 과연 당연한 일일까 하고 고민하게 될 독자가 두어 명이라도 생기게 될지, 별 게 다 궁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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