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에서 김치에 인이 박힌 우리 집 식구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이런 우리를 보고 '그깟 김치'에 목메어 절절대는 상황이라고 혹 비난할 이가 있을까.
김치가 서구 식문화에 맞게 현지화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먹는 김치가 '그깟 김치'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한인마트를 차치하고라도 이름 있는 미국 체인 마트에 가면 김치가 종종 눈에 띈다. '대상 종가' 같은 한국 브랜드가 아닌 현지에서 출시한 김치가 보어 반갑다. 김치 스프레드, 김치 소스, 김치 샐러드드레싱 같은 김치 아이디어 상품이 이목을 끈다.
미국 유기농 마켓의 대명사인 'Whole Foods Market'에서 김치 페이스트를 사 왔다. 미동부 해안의 뉴욕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정확한 제품명은 'MAMA O'S PREMIUM VEGAN KIMCHIL PASTE'이다. 중량은 6oz(168g), 겨우 배추 반 포기를 버무릴 양의 양념이 $10라니, 가격 참 알싸한 고추만큼이나 맵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무도 사지 않을 그것을 과감히 집어든 건 순전히 호기심 탓이었다. 멕시코 핫소스와 같은 맛일지, 예상치 못한 신세계의 맛일지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릴 터였다. 모종의 사명감도 한몫했다. 순수 현지 제품이라는데 적어도 한국인 대표가 한명쯤 나서서 시식평을 해야 할 게 아닌가 하는.
김치 페이스트는 우리의 김치양념 혹은 김칫소에 해당한다. 페이스트에 들어간 재료는 고춧가루, 마늘, 생강즙, 유기농 사탕수수, 소금, 라임즙. '비건'을 표방한 탓에 액젓이나 새우젓이 생략돼 있다.
페이스트를 치아바타에 얹어 맛을 보았다. 한국 김칫소보다 짜고 단맛이 강했다. 제3세계의 맛이다. 짠맛과 단맛의 기본값이 우리의 경우보다 큰 나라란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제법 한국적인 맛이라 느낀 건 목 넘김 후 목이 칼칼할 정도로 고춧가루의 매운맛이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제품에 부착된 QR코드에 접속하니 'MAMA O' 출시 김치를 활용한 네 가지 레시피를 제안하고 있다. 김치땅콩버터 샌드위치, 김치버섯 햄버거, 면역력 강화 샐러드 소스, 그리고 콜리플라워 김치. 내가 구입한 김치 페이스트는 한국 배추나 콜리플라워, 양배추, 오이 등을 버무려 손쉽게 김치를 만들어 먹는 용도로 보인다. 미국 여행 중에 문득 민족의 정체가 주체 못할 정도로 불거지는 날, 이 페이스트 한병이면 어설프게나마 김치 욕구를 달랠 수 있겠다.
때마침 지난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최대 식품 박람회 ‘시알 파리(SIAL Paris) 2024’에서 '대상 종가'의 김치 스프레드와 김치 크런치 바이츠가 혁신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치양념을 스프레드로 만들어 잼처럼 빵에 발라먹는다는 건 전혀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본다. 지금 우리 집 아들이 딱 그러고 있으니까. 머리가 띵하도록 당도 높은 디저트가 진하게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과 쿵짝인 원리. 적당히 매콤하고 개운한 김치국물이 빵의 텁텁함과 느끼함을 가시게 한다는 점에서 김치와 빵은 최상의 조합일 수 있다.
미국 현지 이곳, 마켓 매대 곳곳에 놓인 K-푸드의 대명사 김치 앞에서 K-아줌마는 오늘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김치가 천의 얼굴을 지녔을 거라는 기분 좋은 상상에 취한다. 그것이 세계 여러 나라의 식탁에 올라 스프레드로, 소스로, 빵의 토핑으로, 샌드위치나 햄버거의 맛깔난 양념으로 크게 활약하길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문득 김칫국물 한 숟갈이 그토록 소중해졌다. 주부로 살면서 철이 든 이후 김칫국물 알뜰히 활용하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 생각했는데 그것의 세계화엔 미치지 못했구나 싶다. 앞으론 김칫국물을 샐러드 드레싱으로도 활용해 볼까? 김치종지에 어줍잖게 묻어난 김칫국물은 빵 한 조각 구워내 싹싹 발라 먹을까? 그릇이 묻은 샐러드 소스를 빵 한조각으로 남김없이 비워내는, 그렇게 정갈하게 식탁을 마무리하는 여느 이탈리아인의 습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