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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나의 주방

by 서지현

집안의 큰 쓰레기를 걷어낸 뒤엔 주방의 실상을 마주해야 했다. 그곳은 결코 열고 싶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앞서 집안 곳곳의 구질한 면모를 실컷 떠들어 댔지만 비참한 형국으로 따지자면 주방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씽크대며 오븐, 손이 닿는 기구마다 기름칠 범벅인 공간은 손 하나 까딱하게 싫은 불결과 혐오의 공간이었다. 주방 자체를 완전히 갈아엎거나 업체를 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어 보였다.



미국집 주방에 처음 서던 날, 황량하기 그지없는 주방에서 나는 작은 다짐을 누었었다. 겨우 1년 쓰다 두고 갈 살림, 적당히 살다 가자고. 네 식구 세 끼니 간소하게 차려먹다가 미련 없이 자리를 뜨면 그만 아니겠냐고. 이전 세입자로부터 통째로 물려받은 주방 세간은 애초 나의 의지나 취향과 상관없는 것들이고, 그것들에 크게 정을 붙이기는 힘들 테니 개의치 말자 다짐했다.



허나 문제는 그것이 주방이라는 데에 있었다. 이날 이때까지 우리 가족을 먹이고 살린, 그렇게 한결같이 삶을 지탱해 준 고마운 공간이기만 했다. 내 나라, 내 본거지에서의 형편이 이러한데 하물며 모든 게 낯설고 어려운 이국 땅에서 그것의 존재감이랴. 해외살이에서 주방의 역할비중이 말할 수 없이 커질 거란 걸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1년 해외살이란 적당히 한두 끼 라면으로 배를 채우다 돌아가면 되는 그런 가벼운 여행이 아닐 테니까.



주방을 원상복구 시키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어려울 것 같았다. 이 땅의 정취를 느끼는 일도, 선물 같은 한 해가 안겨줄 온전한 휴식을 누리는 일도, 더 크고 넓은 세계로 향한 그 어떤 호기로운 도전도 먼일로만 느껴졌다. 어쩌면 소소하고 가장 평범한 일상조차 이어갈 수 없을지 몰랐다.



그날로 나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공간을 만들어 보겠노라 첫 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분노를 내려놓고 찬찬히 주방을 둘러보았다. 숨을 한번 크게 고르고는 급하게 꺼야 할 불이 어디인가를 따졌다. 어느 날엔 오븐이, 또 어떤 날엔 전자레인지가 살아났다. 얼마 후엔 냉장고와 씽크대가 제 기능을 찾았다. 틈나는대로 주방 곳곳의 기름때를 벗겨냈다. 칼자국 사이사이 곰팡이가 핀 도마와 코팅 벗겨진 프라이팬, 불필요한 도구와 그릇들은 과감히 내다버렸다.



주방의 묵은때를 한꺼풀 벗겨내자 주방일에 제법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 여럿 나왔다. 평소 관심은 있었으나 다뤄보지 못한 도구들이었다. 굳이 몇 가지 언급하자면 NINJA 믹서와 야채다지기, 무쇠주물팬과 Stauv 오븐용기 같은 것들. 다지기의 성능은 과연 듣던대로였다. 세상에나 이 작은 기구 안에서 깐 마늘 두어 줌이 단숨에 갈려 나왔다. 어떤 채소를 섞어 넣어도 2초면 균일하게 갈리는 것이, 한창 어린아이 밥 지어먹일 때 이 도구를 몰랐던 것이 억울해질 정도였다. 슬슬 요리 욕구가 자극되기 시작했다.





냉장고와 팬트리에 넉넉히 남겨진 식재료와 음식은 매일의 사기를 북돋았다. 냉장고 속 김치, 고추장, 마늘, 토마토소스와 수납함의 간장, 소금, 설탕, 식초, 미림 같은 기본 양념들을 보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뒤늦게 발견한 각종 소스와 허브가루, 이국 향신료는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게 앞으로의 주방일에 훌륭한 밑거름이 될 것들이었다. 이 미국집 주방에 서서 밥을 짓다 보면 얼마 안 가 요리의 반경이 넓혀지리란 걸 쉬이 직감할 수 있었다.



정리에 열을 올리다 속이 헛헛해지면 부침개도 부치고, 국수도 삶았다. 신라면 몇 봉을 끓여낸 날엔 가족 모두 별식을 대하듯 기뻐했다. 그러고도 입이 궁금하면 삼겹살도 굽고 만두도 쪘다. 이 모든 게 우리 몫으로 남겨진 식재료로 만들어낸 음식들이었다. 그러고도 냉동실은 피자, 미트볼, 해산물, 김말이, 아이스크림 등으로 가득했데, 그 수준이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당분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어차피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랑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미국은 한식의 성지다. 내가 거주하는 NC주의 대표적 한인마트(H마트)만 해도 한국인보다 외국인 고객의 비율이 높다. 고국 음식이 그리워 홈씩을 앓는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마음만 먹으면 푸짐하게 한상을 차려낼 수 있다. 웃돈을 얹어가며 직구하기가 망설여지던 각종 향신료와 소스가 쉽게 눈에 띈다. 마트마다 개성 있는 식재료를 선보이고, 유튜버들은 ‘어디에 가니 뭐가 있더라’, ‘무얼 사다 이렇게 해 먹어 보시라’ 소개하기 바쁘다. 순전한 호기심에 알고 싶은 식재료가, 새롭게 도전하고픈 요리가 늘어간다.



어쩌면 나는 사랑하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시작조차 못 하는 바보처럼 굴었던 걸까. 크게 정들면 두고 떠나기 어려울까 봐. 이제 와 길들임에 필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진심과 열정이라는 사실에 눈을 뜬다. 짧지만 뜨거운 사랑을 직감한다. 좀체 마음을 둘 수 없었던 나의 주방이 음식에 대한 진심과 조리의 열기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본다.



그렇게 나는 미쿡(cook) 주부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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