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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일상

나의 장보기 독립

by 서지현

비로소 장보기 독립을 했다. 농사 지으시는 부모님을 둔 덕에 사시사철 온갖 곡물과 채소를 값없이 누려왔었다. 자연히 마트에 갈 일이 적었다. 고기, 계란, 두부 정도만이 내가 구입하는 식료품의 전부였다.



부모님께서 살림의 뒤를 봐주신 건 최고의 특혜였지만 그것은 동시에 만만찮은 일이기도 했다. 두 분의 마음과 손이 태평양만큼 큰 탓이었다. 일주, 혹은 이주 꼴로 올라오는 택배보따리의 규모는 실로 대단했다. 작물의 가짓수도 어마했거니와 양도 많았다. 당근이 철이면 당근 한 박스가, 감자철엔 감자 두어 박스가 올라오는 식이었다. 봄철만한 대목이 또 없었다. 일시에 쏟아지는 봄 푸성귀 폭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많은 나물을 다듬고 데치고 소분하고 무쳐내느라 몇 날 며칠 밤잠을 포기해야 했다.



돌이켜보건데 그것은 주부로서 혹독한 훈련의 시간이었다. 귀한 작물을 하나도 썩혀 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늘 긴장했다. 외식과 배달음식은 특별한 경우에만 허용했다. 식재료를 제대로 보관하고 또 제때 소진하기 위해 요리책을 수시로 들추는 일상을 살았다.






'과연 부모님 도움 없이 잘 해먹고 살 수 있을까?'

미국 입국을 앞두고 걱정이 앞섰지만 마음 한켠에선 해방감이 느껴졌다. 부모의 품에서 막 떨어져 나온 스무 살 대학 새내기처럼 나는 신이 났다. 절로 주어지는 식재료에 얽매인다거나 남겨진 식재료 처리에 대한 강박 없이 언제라도 소용되는 식재료를 구해다 먹고 싶은 음식을 해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벼웠다.



이국 식재료를 알아가고 요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나의 장보기 독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주방 살림에 진심인 내게 미국 마트는 호기심과 도전의 대상이었다. 미국은 과연 '마트 천국'의 나라였다. 가짓수도 많고 규모도 컸다. 무엇보다 마트 저마다의 특색과 개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장 깨기 하듯 이 마트, 저 마트를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 나라 식료품과 물가를 살피는 재미가 좋았다. 새삼 내안에 물건을 보는 나름의 눈과 기준이 있음을 실감했다. 긴 세월 부모님이 보내주신 최상급 작물을 다루며 쌓아온 내공 덕이었다.



나의 관심은 이국 잡지에서만 보아오던 그런 낯선 식재료가 아니었다. 같은 작물이라도 미국 고구마와 한국 고구마가, 또 미국 딸기와 한국 딸기의 맛과 질감이 확연히 달랐다. 한국식 식재료를 대체할 만한 재료를 발견했을 때는 모종의 보람마저 느꼈다.



냉장고에, 저장고에 먹을 게 없어 장을 보러 가는 게 아니었다. 사고 사도 필요한 게 또 떠올랐다. 나의 두 귀는 마트별 추천 아이템과 가격대비 정보에 늘 열려 있었다. 'A마트에 B물건이 좋더라', '제철 채소 C가 D마트에 싸게 들어왔다', 하는 입소문이 나면 당장 그것을 구매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홀푸드(Whole Foods)는 우리 가족이 애용하는 유기농마트다. 홀푸드의 유명세를 통해 미국 사람들의 유기농과 건강식품에 대한 높은 선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본 가격대가 월등히 높지만 아마존 프라임(Amazon Prime) 멤버십을 보유한 덕에 평시에 할인가에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트레이더 조(Trader Joe's)는 핫하고 매혹적이다. '식비를 줄이고 다이어트에 성공하려면 트조를 끓으라' 하는 말이 나돌 정도다. 이곳은 신선식품의 품질이 뛰어난 데다 독특한 PB상품(자체브랜드상품)을 다수 취급하고 있어 젊은 층 마니아가 많다. 무미건조한 식탁에 변화를 주고 싶거나 색다른 간식거리가 필요할 때, 한국식 쪽파 0.99의 행복이 그리운 날엔 트조를 찾는다. 장을 본다기보다는 쇼핑을 하는 기분으로. 한마디로 트조는 생활에 활력이다.



해리스티터(Harris Teeter)는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참새방앗간이 되었다. 매장 한 구석에 알뜰코너가 자리하고 있어 식비를 절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푸드라이온(Food Lion)은 가격이 합리적일 뿐 아니라 지역산물(로컬 푸로듀스)을 다량 취급하고 있어 팬층이 두텁다. 집에서 가까운 매장이 없지만, 이동 중에 보이면 나름의 의무감에 반드시 들른다.



코스트코(Costco)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문전성시다. 개점을 한참 앞둔 시간, 하나씩 카트를 꿰찬 고객들이 줄을 선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창고형 마트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차 주유가 필요한 날에만 가끔 들른다. 이 지역 최저가 기름을 넣은 뒤에 인색한 장보기를 한다. 정가의 20% 할인가에 구매 가능한 우버(Uber) 카드와 한국 김세트만은 놓치지 않고 챙긴다.



H마트는 되도록 가지 말자는 것이 처음부터의 다짐이었다. 기왕 시작한 외국살이, 한인마트 의존도를 줄이고 현지 식재료를 많이 경험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아예 걸음을 안 할 수는 없다. 한 달에 한두 번, 쌀과 김칫거리를 살 때, 아무래도 개운한 콩나물국이 당길 땐 못 이기는 척 H마트 행이다.



이렇게나 다양한 마트를 돌고도 미국 내에 아직 가보지 못한 매장들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한동안 마트 탐방의 시기를 보내고 나면 정착의 시기가 오긴 할는지 궁금하다.






커다란 즐거움 뒤엔 더 큰 책임이 따른다. 집에 돌아와 그날의 식재료를 정리하고 손질하는 일, 이것이 마트 장보기 후 마주하게 되는 주부의 숙명이다. 익숙지 못한 식재료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고민하며 해외 거주 유튜버들의 아이디어를 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조리를 시도하느라 그 어느 때보다 주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주부로서 나는 제 2의 훈련기를 살아내고 있다. 가끔은 흐뭇한 상상도 한다. 부모님께서 대주시는 거대 물량의 식재료를 더는 겁내지 않는, 나는 조금은 큰 사람이 되어 본국에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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