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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통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by 서지현

한국에서 챙겨 온 양념과 식재료가 하나둘 바닥을 드러낸다. 집간장이 가장 먼저 동이 났고, 들깻가루와 들기름이 연달아 떨어졌다. 아끼던 비트소금을 전부 써버렸을 땐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비트가루가 시즈닝 된 소금은 은은한 보랏빛이 돌았다. 음식 위에 촙촙 뿌려진 소금은 석양에 반짝이는 모래알 같이 고왔다. 그 아름다움을 보는 잔잔한 기쁨을 주방에서 오래도록 누리고 싶었는데.



무심코 냉장고문을 열었다가 집된장이 얼마 남지 없았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 집에서 된장의 위상은 김치와도 같아서 똑 떨어지면 꽤나 불안하다. 된장국 끓이는 횟수를 줄이는 수밖에 없겠다고, 속이 영 편치 않거나 여독이 심할 때만 된장을 풀어야겠다고 마뜩잖은 다짐을 한다.



어제는 시래기를 삶았다. 미국 올 때 가져온, 친정엄마가 손수 말려 주신 시래기다. 생각 없이 두 움큼 크게 집었다가는 아차 싶어 한 움큼 슬며시 내려놓았다. 평소라면 곰솥에 물을 가득 받고 넉넉히 삶아 시래기밥을 짓고, 국도 끓이고, 그러고도 양이 남으면 나물로도 조물조물 무쳐냈을 텐데 그러기엔 남겨진 시래기 양이 턱없이 적었다.




여덟 대 중 두 대의 캐리어에 먹거리를 가득 채워 끌고 왔다. 된장, 간장, 고추장은 물론 소금, 후추, 참깨, 들기름, 들깻가루, 거기다 직접 담근 생강술까지. 입을 거리와 생필품을 줄여가며 간장 한 병을, 된장 한 통을 부득불 욱여넣는 날 보며 남편이 핀잔조로 말했었다. '거기 H마트(한인마트)에 가면 다 있어'.



난 누구보다 현지 식재료를 경험하는 일에 열심을 낼 사람이었지만 양념만은 다른 문제라 생각했다. 부모님이 손수 농사지어 만들어 주신 토종 양념들은 우리 식단의 뿌리였다. 우리 가족 1년 미국살이를 지탱해 줄 배터리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아스라이 바닥을 보이는 양념통을 대할 때면 기분이 묘했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야속한 동시에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올랐다. 이곳에 온 목적이 마치 챙겨온 양념들을 말끔히 비우는 거라도 되는 것처럼 참 열심히 지지고 볶으며 살았구나. 아이가 낯선 삶에 적응하며 호되게 앓았던 피부병이 자연 치유된 것이, 남편의 피부 알러지가 큰 고비를 넘긴 것이, 한식에 대한 큰 향수 없이 때마다 만족스런 밥상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 그럭저럭 평안한 날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알뜰하게 챙겨 온 양념과 식재료 덕분인지 몰라.



비워지는 양념통을 바라보며 돌아갈 날을 계수하는 우리는 처음부터 1년짜리 해외살이 깜냥이었는지 모른다. 살아볼수록 빠져드는 이곳에서 아직 경험하고픈 일이 많지만, 시원하게 비워진 양념통과 함께라면 얼마간의 섭섭함과 미련일랑 기꺼이 내려놓고 제법 시원하게 이곳을 뜰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루, 또 하루를 소중히 할 때임을 의식한다. 바닥에 얕게 깔린 양념과 동나기 시작한 식재료를 아껴 꺼내먹듯 남겨진 날들을 그렇게 아껴가며 살아야지. 우리, 이거 다 먹으면 집에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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