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리고 살림
'워터', '파크', '랜드'가 들어간 여행 키워드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몸이 찬 체질이라 물을 가까이 하는 게 싫고, 온종일 인위적인 공간에 갇혀 경쟁하듯 기구를 타는 일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번 플로리다 여행은 비호감 여행 키워드의 총합이었다. '시월드'와 '디즈니워터파크'를 방문하고 해변을 끼고 매번 색다른 바다를 도는 일이 여정의 큰 축이었으니 말이다. (하마터면 레고랜드도 갈 뻔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어디서든 물만 보이면 본능적으로 뛰어들었다. 숱한 놀이기구와 워터슬라이드의 스릴에 몸을 맡길 줄도 알았다. 나만 홀로 이방인이 되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럼에도 한껏 고양된 여행의 흥을 깰 수 없어 그럭저럭 보조를 맞추었고, 그러는 사이 몸과 마음은 시들시들 메말라갔다.
"동선 중에 드리프트 스토어(Thrift Store)나 굿윌 스토어(Goodwill Store)가 보이면 날 좀 내려줄래?"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그것은 나의 여행 취향도 좀 존중해 달라는 항변이었다. 그는 흔쾌히 '그러마' 했고 그 길로 내게는 하루 한 곳, 많게는 두세 군데 중고매장에 들러 취향놀음을 할 길이 열렸다.
그날도 남편은 어느 중고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암만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별 소득이 없었는데 마침내 딸아이가 제게 꼭 맞는 선글라스 하나를 찾아냈다. 안경값은 겨우 1달러, 하필 현금이 없는데다 구매 금액이 최소 5달러는 되어야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고 했다.
'작정하고 뒤지면 뭐라도 나오겠지.'
금액을 맞추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번 보물찾기에 돌입했다. 발길은 뭔가에 이끌린 듯 이미 주방코너로 향하고 있었다. '에이 아까도 살펴봤는 걸', 마음이 볼멘소리를 하는 사이 내 시선은 어수선하게 널린 냄비들 위에 머물렀다.
그때였다. 위로 몇 개나 되는 냄비를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은빛 냄비 하나가 '반짝' 하고 내게 눈짓을 보냈다. 쌓인 냄비들을 들추고 보니 멀쩡한 냄비였다. 옆면에는 '5 ply nicromium surgical steel/MADE IN U.S.A./TAMPA.FL'라 쓰인 로고가 명함처럼 새겨 있고, 바닥에는 '1달러' 가격태그가 거짓말처럼 붙어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두께감이 상당한 스텐 양수 냄비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냄비를 들자 묵직함이 신뢰처럼 전해져 왔다. 충만한 만족감이 포만감처럼 차올랐다. 한 마디로 그것은 '물건'이었다.
길을 지나다 100달러짜리 지폐를 발견한 사람처럼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딸아이가 3달러짜리 장난감 하나를 손에 쥐고 나타났다. 우리는 당장 5달러치 값을 치르고는 누가 볼세라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 길로 나는 '물건'의 완전한 '임자'가 되었다.
냄비는 플로리다 템파(TAMPA) 지역에서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아마존 같은 대형 체인이나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찾을 수 없는, 현재로선 단종된 상품으로 보였다. 중고시장에서 40-50달러에 거래되고 있는 걸 보면 '휘슬러'나 '샐러드마스터' 같이 대중적인 유명세를 타는 브랜드는 아니지만 고퀄의 제품임에 틀림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새로 들인 냄비로 냄비밥을 지었다. 냄비 바닥에 보드랍고 쫄깃한 눌은밥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희한하게도 냄비는 오래 길들여 온 물건처럼 손에 익었다. 다음날은 그걸로 국을 끓이고 찌개도 끓였다. 딸기잼을 졸이고 토마토소스도 끓이고, 1-2인분 김치볶음밥도 맛있게 만들어 냈다.
'스댕러버'는 신이 났다. 미국집 주방에 변변찮은 스텐 재질 냄비가 없어 요리를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늘 석연치 않았는데, 예기치 않게 '물건'을 만나 주방일이 한결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뚜껑이 없다는 점을 따지면 이토록 요긴한 물건이 중고시장에 '1달러'에 나왔다는 게 수긍이 갔다. 원래 '통 5중', '통 7중' 하는 스테인리스 냄비일수록 뚜껑의 역할이 못지않게 중요한 법이다. 냄비의 두께감에 걸맞은 뚜껑이 몸통을 묵직하게 눌러줘야 저수분 요리도 무수분 요리도 가능하다.
살림의 묘미란 종종 작고 사소한 일에서 온다. 이런 맥락에서 살림과 여행은 닮아 있다. 크고 화려하다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요, 계획대로만 척척 진행된다면 살림이든 여행이든 재미가 떨어질 것이다. 다소 고단한 여행, 지루하고 끝이 없어 보이는 살림의 여정 앞에 마음 문을 열어야 할 이유는 그것이 갖는 '의외성' 때문일 것이다. '뜻하지 않은 어떤 좋은 일'이 내게로 와락 달겨들 수 있도록 가슴을 활짝 펴야 한다.
냄비는 우리 집 주방에서 여전히 대활약 중이다. 그것을 벗 삼아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나는 결코 쉽지 않았던 플로리다 여행길을 흐뭇한 마음으로 추억한다. 굽이 굽이 그 험난했던 여정이 오늘날 나의 주방을 풍요롭게 한다. 냄비의 짝, 그에 꼭 맞는 뚜껑을 찾아내기까지 나의 여행은 끝난 게 아니다.
언제나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림을 살고 싶다. 사부작 살림살이를 매만지다가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픈, 봄의 정취가 가득한 오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