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별천지여라

(4) 단양으로 떠난 여행

by 서지현


일상에 매여있던 내겐 차라리 별천지라야 옳았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큰 기대감 없이 떠난 여행 끝에 도사리고 있던 의외의 즐거움이었을까?


고수동굴, 무심코 발을 디딘 그곳은 전연 딴 세상이었다. 뭐랄까,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들이 우연한 기회에 초현실의 세상으로 빨려들어가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경험을 하게 되는, 내게도 일종의 그런 경험이었다.



9살 아들이 그린 고수동굴,'천년의 사랑', 순전히 기억의 잔상에 의지해서




때때로 인간은 수년 내에 완성한 도심 속 화려한 건축물과 마천루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은 동굴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쩌면 인간이 쌓아온 경험과 지식의 범주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고,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었다. 동굴은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이 세상의 공간이 전혀 아닌 듯,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더딜지언정 상상치 못할 꾸준함으로 지속돼온 침식과 퇴적의 작용. 기괴하리만치 섬세한, 혹은 웅장한 생성물은 가늠치 못할 시간의 흐름이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끝내는 원대한 그 무엇을 이루어내고야 마는 자연의 진실된 열정, 그 앞에서 엄숙함을 느꼈다.



밖은 영하를 크게 웃도는 찬 일기였지만 동굴은 오히려 따뜻했다. 아늑하고 온화하기까지 했다. 우리 네 가족은 외투를 벗어 한 팔에 걸친 채 다부지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안내자의 말로는 700계단이라 했다. 강제하는 힘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우리는 순전히 기암괴석과 동굴생성물의 경이로움에 취해 걸었다. 단단한 두 다리에 두근거림과 용기를 싣고 걷고 또 걸었다. 아이도 어른도 고된 줄을 몰랐다. 다리에 큰 힘이 절로 실리는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아이들은 '동굴탐험이 워터파크만큼 재미있었다'고 했다. 동굴을 워터파크 물놀이의 재미에 견줄 정도라면 가히 최고의 찬사인 것이다. 아들은 돌아와서도 동굴에 대한 기억을 남기고 싶어했다. 동굴 내부에서는 촬영이 금지돼 있었던 탓에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는 순전히 기억의 잔상에 의지해 동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결국 아이의 도화지에는 석순과 석순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 만나 이룬 절정의 기암괴석, <천년의 사랑>이 새겨졌다.



책상머리를 뜨지 못하는 수험생처럼, 퇴근해서도 업무를 놓지 못하는 직장인처럼, 집을 떠나와서도 자꾸만 돌아갈 일상을 재는 내게 동굴은 엄중한 경고음을 날리는 것만 같다. 그렇다, 떠날 바에야 차라리 별천지여라. 때로는 강제휴식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비단 나뿐이랴. 효율과 합리성, 손익을 셈하며 살아가는데 익숙한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별천지에서의 휴식이다. 머리로는 도저히 계산할 수도, 따지고 들 수도 없는 차원 다른 경험말이다.



가상 세계에서의 여행을 마친 판타지 속 인물들은 유약과 나약의 표피를 벗고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현실 세계로 돌아오곤 했었다. 나 역시 그렇다. 이것이 여행이 가져다 주는 모종의 안위요, 위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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