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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어린 May 17. 2023

음악을 말할 때 반짝반짝 빛나는 산달에게

지리산에서 보내는 펜팔(15) - 덕복희의 곡우 편지

산달! 매번 이런 식으로 편지를 시작하는 것 같지만… 지난 편지는 정말 최고였어요! 산달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군요. 음악을 이야기하는 산달은 다른 편지에서보다 유난히 더 발랄하면서도 포근하게 느껴져요. 여명이 드는 예배당에서 혼자 드뷔시를 연주하는 산달의 모습은 정말 근사할 거예요. 어린왕자의 구절에서도 무릎을 탁 쳤답니다. 안간힘보다는 오히려 시간에 몸을 맡기면서 해결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장구를 처음 칠 때는 제가 마치 돌돌 쥐어짠 빨랫감이 된 기분이었어요. ‘장구가 내 몸을 파고든다’고 느껴질 만큼 몸에 붙들어 메라고 하거든요. 일 년이 지나고는 장구가 엄청나게 불편하진 않아요. 피아노가 산달을 변화시켰듯이 장구도 제 몸을 길들였나 봐요. 산달의 피아노와 비교하기엔, 전 장구를 너무 게을리 쳤지만…


악기를 배우는 게 어떠냐는 들뜬 질문이 참 반가워요. 악기와의 순간을 이토록 소중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을 하는 듯이 설레요. 우쿨렐레는 이제 막 배우는 단계라서 즐겁고 가벼워요. 소리가 형편 없어도 노래 부르는 재미로 치고말죠. 그런데 장구는 워낙 잘하는 분들과 하니 기가 죽기도 해요. 우쿨렐레는 동네의 조그만 동호회처럼 모이는 반면, 장구는 ‘호남여성농악보존회’라는 전문기관에서 배워요. 아마 디스코팡팡을 타면서도 장구를 끄떡없이 치실 듯한 무형문화재 원로 선생님이 계시고요. 


장구수업은 중년 여성 수강생이 압도적인데, 선생님께서는 수강생을 통틀어서 ‘엄마들’이라고 칭해요. “자, 이때 엄마들이 삼채 시작해요.” 이렇게 지시하거든요. 그 ‘엄마들’이 어찌나 장구를 다 잘 치시는지… 대충 흉내만 내다가 집에 돌아오면 진이 쏙 빠져요. 재밌는 게, 우쿨렐레 수업은 나이 많은 이웃들이 저를 ‘애기’라고도 부르시는데요. 두 악기수업 동안 전 애기가 됐다가 엄마가 됐다가 하는 셈이에요. 둘 다 도무지 어리둥절한 호칭이지만, 역시 애기였던 적은 있어도 엄마였던 적은 없어서 그런지 장구수업이 훨씬 어렵게 느껴져요.


지난 편지가 왜 최고였는지는 바로 이제야 말할 참인데요! 산달이 건넨 마지막 질문이 저를 오랫동안 몰두하게 한 까닭이어요. 새들의 목소리가 여러 주파수의 화음일 거라는 말은 참으로 당연하면서도 놀라웠어요. 해가 저물 무렵 마당을 어슬렁대다보면, 새소리 같기도, 고양이 소리 같기도, 곤충 소리 같기도 한 묘한 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요. 누군지 정체를 통 몰랐는데, 어쩌면 그건 그들 모두의 소리였을 지도 모르겠더군요! 저의 진지함도 우리의 유연함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주파수일 지도 모른다는 말 역시, 참으로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헉’하고 숨을 절로 들이켰어요. 산달이 꼭 예리한 심리상담사처럼도 느껴졌답니다. 


분명 제 진지함도 어떤 순간엔 화음을 만들어낼 텐데, 실은 잘 모르겠더라고요. 진지함을 미워하기 바빠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나 봐요. 다만 어느 순간에는 진지함도 유연함을 만드는 재료가 될 거라는 그 다정한 말이 참 고마웠어요. 산달 역시 잡담이 어색하다는 맞장구를 쳐주어서 위로도 많이 되었고요.


이번 주제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인데요. 저를 싫어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체로 저를 재수 없어 했던 것 같아요. 이게 참 표현이 모자란데... ‘재수 없다’는 말 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어디서 진단해준 건 아니지만, 전 완벽주의 강박이 있는 모양이에요. 제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보여줄 용기가 안 나요. 어릴 적에 전 그림 그리기를 아주 좋아했는데요. 사람을 그리면 꼭 얼굴에 눈, 코, 입을 안 그렸대요. 머리칼이나 옷차림은 섬세하게 그리는데 얼굴만 텅 비어있는 거죠. 부모님은 좀 섬뜩하기도 하셨겠어요. 제 딴에는, 얼굴은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거길 실수했다간 그림 전체를 망칠까 봐 손도 못 대는 거였어요. 요즘도 전 비뚤어진 커텐과 색조합이 영 맞지 않는 침대시트를 잘 견디지 못해요. 컴퓨터의 가득 찬 휴지통과 정렬되지 않은 폴더도 마찬가지고요. 늘 다른 사람들에게도 정돈되고 절제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해요. 완벽주의는 아마 겁이 많은 사람들의 질병일 거예요.


저는 이런 강박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저를 재수 없어 한다고 느껴요. 사람들에게 잘보이고 싶어 생긴 강박일 텐데 참 역설이죠. 다른 건 사소한 걸로 꼬투리를 잡으면서도, 제 허점은 보여주기 싫어하니 진짜 재수 없긴 한 것 같아요. 그런데도 제 교우관계가 썩 나쁘지 않은 것은, 아마 아무리 허점을 가려도 남들 눈엔 훤히 보이기 때문일 지도 몰라요. 정말로 완벽해 보이면 진짜 재수 없을 텐데, 전 허점투성이라 별로 재수 없을 것도 없는 거죠. 벽에 비뚤어진 커텐은 못 견디면서, 제 얼굴은 씻지도 않아서 하루 종일 눈꼽을 달고 다니는 식이에요. 말이 샜는데, 제가 세수를 안 하는 걸 고백하려 한 말은 아니고... 제 진지함도 아마 이 완벽주의 강박에서 기인한 게 틀림없다는 말이었어요. 이쯤 되면 ‘진지함’도 억울할 것 같아 화음을 만드는 순간을 요리조리 골똘했는데요. ‘진지함의 순기능 찾기’ 숙제를 풀지 못한 변명만 들고 왔습니다.


최근 열흘 간 아주 골치 아픈 일이 있었답니다.  제가 매번 진지한 꿈만 꾼다고 했던 말을 취소해야겠어요. 어느 날 똥꿈을 꾸었어요. 김밥김에 단무지까지 넣어서 똥을 돌돌 말아먹는 꿈이었는데요. 똥꿈이면 복권을 사야한다고들 하길래 좋은 일을 기대했어요. 그날 새벽 어스름한 부엌을 지나다가 발바닥에 촉촉하고도 바삭한 무언가가 닿았어요. 소스라치는 느낌에 펄쩍 뛰어올랐는데… 바나나만한 지네님이었답니다. 밟았다기보다 스친 정도라서 제가 해를 끼친 것 같진 않은데 이미 어디가 아픈지 몸을 또아리를 틀고 힘이 없었어요. 만약 이 정도 통통한 지네님이 팔팔한 상태로 절 물었다면 아마 그 새벽에 응급차를 불러야 했을 지도 몰라요. 제 복권꿈은 그렇게 지네님이 절 살려준 목숨값으로 퉁쳐버린 것이죠. 그날은 하루종일 발바닥에 지네 화석이 박힌 양 그 감촉이 가시질 않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물리진 않았으니 촌인식은 아직이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414기후정의파업 전날 일이 터졌어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상한 날갯짓 소리에 새벽 2시에 잠에서 깼는데요. 집안이 날개달린 흰개미떼로 뒤덮인 거죠. 새벽에 흰개미떼와 전쟁을 벌이다 일단 세종시로 후퇴했는데요. 일주일 뒤, 3배가 되는 흰개미떼가 정말이지 모래알처럼 나무기둥에서 쏟아져 나왔어요. 이 흰개미님들은 나무를 먹고사는데요. 주로 동남아에서 서식하는데, 우리나라 남부가 아열대기후로 변하면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해요. 죽은 나무가 주요 먹이라니, 생태순환을 위해 없어선 안될 분들이지만… 저희 집을 순환시키려고 나서실 줄은 몰랐어요. 실로 동남아나 호주에선 이 흰개미 때문에 집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대요. 기사를 검색해보니 우리나라 남부지역 목조문화재들도 여럿 흰개미님들의 공격에 맥을 못 추나봐요. 


열흘 가까이 집에 못가고 인근 빈집에 피난을 와있어요. 방역업체에 문의해보니 왜 이렇게 늦게 연락을 했느냐고… 이 정도 크기의 성충과 유충의 양이면 이건 최근 일이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집을 갉아먹고 있었을 거라더군요. 개미떼가 나온 나무 기둥을 통통 쳐보면 텅 빈 드럼통 같은 소리가 나요. 흰개미떼가 나온 이후론 아무리 씻어도 몸이 간지러운 기분이고, 검은깨가 박힌 쿠키를 보면 개미가 박힌 줄 알고 흠칫 놀라고, 꿈에서도 내내 개미 꿈만 꿔요. 산달이 지난 편지에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된다’는 멋진 문장을 전해주었는데, 전 개미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 개미가 된 게 분명해요.


근래 식욕이 없고 무기력한데, 제 짝꿍도 상태가 비슷해요.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는 와중, 이웃 개를 산책시키고 모종들 물 주는 일은 멈출 수가 없으니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겨우 움직이고 있어요. 지리산엔 골프장을 짓겠다고 해서 또 그 관련 자료를 며칠간 정리하다보니 영 어깨와 목이 아파서 편지를 쓰러 노트북 앞에 앉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저희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안부를 물어오고, 탱자쌤은 ‘이건 기후재난이다! 기사로 써야한다!’며 노발대발 해주셨다니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되기도 해요. 어쨌거나 촌인식을 거하게 치룬 것 같죠? 바나나만한 지네님보다 새끼손톱만한 흰개미님이 더 무섭더군요.


기가 막히고 우울한 이야기로 마무리가 돼서 난감하네요. 편지가 늦어 미안한 마음을 전해요. 제가 존경하는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가 이런 말을 했어요. ‘삶은 생각보다 진지하지 않다!’고요. 전 기차를 놓치기 직전이나,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이 문장을 주문처럼 외우곤 해요. 생각보다 별일 아닌 것들에 우린 너무 크게 상심하고 침울하잖아요. 흰개미님에게 집을 뺏긴 순간에도 이 주문을 외웠어요. 이건 별일이 아니다! 낙관적으로 생각하자! 하고요. 그런데 역시 기운이 쪽쪽 빠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삶이 진지하지 않다는 걸 배우기 전에, 진지함과 화해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산달! 숲도 마을도 새소리로 가득해요. 제비가 돌아왔고요. 아주 가까이서 할미새와 오목눈이와 팔색조를 본 행운을 자랑하고 싶어요. 썩어서 한바탕 죽었던 감자는 또 다른 새순이 올라와서 다들 번듯하게 자라나요. 요즘은 산 전체가 소나무 꽃봉오리가 된 양 노란 꽃가루를 안개처럼 뿜어내요. 고단했던 열흘 남짓 안에, 산달의 따스한 청명 편지를 포함해서 좋은 소식도 꽤 많았군요! 전 흰개미님을 너무 많이 죽여서 위령제를 지내야겠어요. 산달도 멀리서 물 한그릇 떠다놓고 기도해주세요.


흰개미가 된 덕복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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