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기록으로 다시 숨을 찾기
“오늘도 고생 많으셨죠?”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정작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일 잘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실수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그래야만 나의 존재가 유효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일로 자신을 증명하는 삶을 오래 살아왔다.
사회학자 혹실드(Arlie Hochschild)는 감정노동을
“조직이 요구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개인의 실제 감정을 관리·조절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현장에서는 이 말이 추상적이지 않다.
화가 난 대상자에게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해야 하고
울고 있는 이에게는 나의 감정과 상관없이 따뜻한 말을 건네야 한다.
내가 바쁜 날에도 상대가 혼란스러우면
내 마음을 접어두고 그의 세계에 먼저 들어가야 한다.
나는 그 일을 너무 잘했다.
그래서 문제였다.
감정노동은 내 안에 쌓여도 표정과 말투로 들키지 않는다.
하지만 몸은 정확히 기억한다.
어깨가 굳고, 숨이 짧아지고, 하루가 끝나면
말 한마디 없는 방에서 조용히 무너진다.
지금,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한 어르신이 큰 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왜 내 말을 이해 못 하는 거야! 당신도 똑같아. 다 똑같아!”
나는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더 정확히 설명해 주세요.”
그 웃음 뒤에서, 내 마음은 아주 조용히 금이 가고 있었다.
‘왜 나는 항상 괜찮은 척해야 할까?’
‘왜 나는 화낼 수 없을까?’
‘왜 나는 여기서도 나보다 타인을 먼저 돌보고 있을까?’
그날, 집까지 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돌아보면 답은 간단했다.
나는 너무 오래 ‘일을 잘해야 한다’는 정체성으로 살아왔다.
삐걱거리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고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두려웠다.
그래서 내 감정은 늘 마지막 순서였다.
“오늘 힘들었다”는 말은 애초에 허락되지 않았고
“나도 도와달라”는 말은 더더욱 꺼낼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누군가의 의지가 되는 사람으로 교육받았고
성인이 되어도 그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감정노동의 세계에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부터 빠르게 소진된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날, 한 상담가가 내게 말했다.
“감정은 쌓는 게 아니라, 비워내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마음 깊숙이 박혔다.
그날부터 나는 감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글은 아니었다.
단지 그날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적어두는 일.
“너무 억울했다.”
“속상했지만 웃어야 했다.”
“상대의 분노를 견디느라 에너지가 빠져나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감정을, 드디어 종이에 내려놓았다.”
기록하는 순간, 감정의 무게가 옮겨지는 느낌이었다.
잔잔하게 울리던 불안이 글자로 떨어지며 형태를 갖췄고
형태가 생기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하게 되니,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 작은 글쓰기가
나를 천천히 구해냈다.
감정을 기록하는 일은
‘나는 오늘도 인간이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나는 감정을 숨기는 무표정한 전문가가 아니라,
감정 속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자주 이렇게 묻는다.
“나는 지금 괜찮은가?”
그리고 예전엔 절대 하지 못했던 대답을 한다.
“오늘은 조금 괜찮지 않습니다.”
이 고백은 약함이 아니라 용기였다.
내 존재를 ‘성과’가 아니라 ‘감정’으로 확인하는 최초의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종종 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결국 나를 지키는 것은
성과도, 평가도, 명함에 적힌 직책도 아니었다.
나의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나 자신이었다.
감정을 숨긴 채 버티는 사람은 오래 일하지만
감정을 돌보는 사람은 오래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