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탓이 아니라, 우리가 일하는 구조가 사람을 소진시키고 있다.
“요즘 너무 지쳤어요.”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하면 나는 늘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오래 참아온 문장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위기 가구를 만나고
사람들의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함께 견뎌왔다.
출소자, 고립된 노인, 우울로 방에 수개월 갇힌 청년
삶의 방향을 잃은 누군가를 찾아가 앉아
말을 듣고, 울음을 받아내고, 해결책을 찾았다.
나는 늘 “사람”을 돌봤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깨달았다.
가장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사실 일하는 우리 자신이었다는 걸.
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관리 잘하세요.”
“스트레스 조절하세요.”
“자기 돌봄을 실천하세요.”
하지만 자기 돌봄이 불가능한 구조에서 자기 돌봄을 말하는 건
침몰하는 사람에게 “물 마시는 양을 줄여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정서적 노동을 하고
의사결정의 무게를 짊어지며
사람들의 절망을 받아낸다.
퇴근 후 집에 와서도 머릿속은 조용히 일한다.‘그분은 괜찮을까?
‘내일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까?
‘이번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감정과 사고를 동시에 소모하는 일이라는 건,
현장에 있는 사람만 안다.
번아웃은 “내가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감당하게 만든 시스템이 과도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나는 많은 직원들이 ‘상담의 온도’를 조절하는 모습을 봤다.
화가 난 사람 앞에서 미소를 유지하고
울부짖는 사람 앞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서류와 회의를 병행하며 뛰어다니면서도
평온한 얼굴을 유지해야 한다.
감정의 절반은 숨기고
절반은 업무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지켜주는 제도는 없다.
위험수당 없음
자격수당 없음
인력 부족
정서적 디브리핑 체계 없음
연차조차 죄책감 없이 쓰기 어려움
업무량은 부풀고 책임은 확장됨
“버티는 사람”만 살아남고
“지쳐 쓰러지는 사람”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라는 걸
어떤 직업도 정서적 체력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제도는 사람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번아웃은 개인이 아닌 ‘조직의 결과’로 나타난다.
내 일상도 그랬다.
오전엔 위기 가정 방문
점심시간엔 민원 전화 응대
오후엔 회의와 보고
퇴근 무렵에는 추가 상담이 이어졌다.
그리고 하루가 끝나면
현장에서 들었던 울음과 분노가
내 마음 한구석에 눌어붙었다.
나는 늘 스스로에게 말했다.
“난 괜찮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하지만 어느 순간 알았다.
괜찮아 보였던 게 아니라, 무뎌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겪은 번아웃은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너무 오래 버텼기 때문’이었다.
휴직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했다.
회복은
마음가짐을 바꾸는 게 아니라
환경을 바꾸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서노동을 공적 노동으로 인정받는 것
관리자의 평가 기준이 ‘성과’만이 아닌 ‘지속가능성’이 되는 것
감정 디브리핑 시간 보장
위험수당·자격수당 등 적정 보상 체계 마련
인력 충원으로 개인에게 집중된 무게 분산
‘쉬어야 계속 일할 수 있다’는 조직 문화
사람을 소진시키는 구조를 바꾸지 않고
“각자 알아서 회복하라”고 말하는 것은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방식일 뿐이다.
번아웃을 줄이려면
우리 사회는 사람의 체력과 감정의 한계를 제도적으로 고려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복직하면 예전처럼 “다 괜찮다”는 말을 남발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은 더 솔직하게
“이건 과하다”
“이 구조는 위험하다”
“이 일엔 제도적 보호가 필요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느낄 것이다.
우리는 게으른 것도, 나약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인간답게 일하고 싶을 뿐이다.
번아웃된 사회가 회복되려면
개인의 의지보다
시스템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그게 우리가 계속 “사람”을 돌볼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정확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