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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Jul 24. 2019

일상의 틈

평범한 일탈, 사진과 창작글

 갑자기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평소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탈을 해보고 싶은 용기가 생기곤 한다. 그 일탈은 사실 거창한 것도, 법에 저촉되지도 않는 아주 사소한 것들인데, 지금 내가 공원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는 것 같은 평범한 일이다. 이런 일에도 큰 마음을 먹어야 하다니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지?


'사랑해요.', ' 배고파요.', '잘했어요.', '궁금해요.', '잊지 말아요.', '네 맞아요.', '추워요.', '고마워요.'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그녀의 작은 입술이 움직인다. 나에게 했던 말들 중에 고작 생각나는 것들은 저 정도의 단어다. 상처되는 말은 억지로 잊었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도 아니었지만. 앞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마지막에 했던 고마워요, 궁금해요 그런 말과 분위기만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뭐지? 뺨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벤치에 앉아 얼굴에 맺힌 빗방울을 비비며 마른세수를 해본다. 정신 차리자.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얼마 없다. 지나가는 여름 바람의 장난인지 금세 땅이 말랐다.


‘팀장님은 어제 뭐하셨어요?’


 내일 회사에 가면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해본다.


‘그냥 혼자 바람 좀 쐬고 그랬지.’


 아니다. 뭔가 근사한 하루를 보냈다고 말하고 싶다. 혼자여도 재밌는 일이 많으니까. 나는 거짓말하기 싫어서 극장에 가볼까 핸드폰을 꺼내 검색해본다.



 딱히 흥미를 끄는 영화가 없다. 어렸을 때는 영화를 정말 좋아했는데, 이제는 일 년에 몇 편 보는 게 전부다. 영화를 많이 본다고 내 세상이 풍족해지는 것도 아니고, 돈 버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좋았다. 사실 누군가와 데이트하기 위한 구실로 봤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영화도 몇 편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의 의도라든가 진중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도 별로 없다. 좋았던 배우들에 대한 껍데기뿐인 대화. 대체 영화는 그때 왜 그렇게 많이 본 걸까.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그런 생각을 하나? 사람들이 그냥 시간 때우려고 자기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무언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감독들이 있다면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할 일이다.


 맑았다 흐렸다 하는 하늘 아래의 공원. 평일 낮에는 산책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곤 아주 고요하다. 사람이 너무 없어서 곳곳에 있는 CCTV가 혼자 돌아다니는 나를 추적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랑했다. 그런데 더 이상 보고 싶지는 않다.



 유명한 추상 화가인 피카소 전시에 갔던 적이 있다. 그의 초창기 그림은 추상화가 아니었다. 아주 사실적인 묘사가 담긴 그림들이 있었다. 피카소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피사체의 본질과 상관없는 것들을 하나 둘 지우기 시작했고,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본질적인 모습만을 남기며 추상화의 화풍을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본질을 본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정의 내리기보다는 다양하고 개인적인 이유에 관대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사랑의 본질에 대한 시각이라든가 내 기준 없이 사람들을 만난 것 같다. 공원 벤치에 앉은 후로 집에 오는 동안 머리에서 생각이 요동친다. 머릿속에 커다란 댐이 있고 생각이 가득 찼던 것 같다. 이렇게 멍 때리는 시간에 수문이 열리고 흘려보내야 할 것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시간을 종종 가졌어야 했는데, 왜 그러질 못했을까. 이렇게 멀리 뻥 뚫려있는 풍경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눈이 시원하다.


인천 청라호수공원 (2019. 7. 23)



♪ Sigala ‘Lull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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