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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l 02. 2021

#48. 한국행...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48. 한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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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


(William Ernest Henley의 시, INVICTUS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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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만 해도 나는 어학연수를 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몇 달씩 외국에 머무는 것은 내 머릿속에는 없던 일이었다. 

여건도 안 됐고 갈 이유도 없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지인 중 한 명이 필리핀을 다녀온 후 필리핀 어학연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아마도 필리핀 여행 중에 어학원에서 운영하는 ‘영어 캠프’에 참여한 어린 학생들과 같은 호텔에 묵었던 

것 같다. 그는 매우 부정적으로 필리핀 어학연수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해 줬다. 

그때까지 나는 필리핀이 영어를 쓰고 어학연수 코스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얼마 후 내가 일하던 곳이 망해서 문을 닫게 됐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것이다. 마지막 3개월 정도는 

월급도 받지 못해서 통장에 현금이 100만 원도 안 남아 있었다. 앞이 막막했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아는 후배가 짧고 굵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데 한 번 해볼 생각이 있냐고 

연락이 왔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나는 고맙게 생각하며 3개월간 전국을 떠도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 일로 약 천만 원 정도의 현금을 모았다.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천만 원의 현금을 앞에 놓고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해 봤다. 

그러다 문득 필리핀 어학연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때부터 어학연수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필리핀 세부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됐다.


나는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봤다.


질문 1)

내게 현금 천만 원이 있다. 서울에서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1년을 버틴 후 내 모습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답)

아마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 돈을 아껴 쓰면 서울에서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1년 후에는 뭐가 되어 있을까? 아는 사람들을 

기웃거리다 보면 전에 하던 일과 비슷한 일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일은 미래도 없고 발전 가능성도 없는 일이다. 돈도 안 된다. 

그런 일을 신념만 가지고 10년 이상 했다.  

똑같은 직장을 구한다면 전과 마찬가지로 가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뭔가를 항상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질문 2)

내게 현금 천만 원이 있다.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최대 6개월 정도 갈 수 있다.

6개월 후 내 모습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

어학연수 동안(6~8개월)은 별 문제없겠지만 연수가 끝나면 가진 돈 탈탈 털려서 오갈 데가 없어질 것이다. 

나는 누구도 6개월 만에 외국어 도사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니다. 혹시 내가 어학에 재능이 있어서 영어에 도사가 되어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내 인생이 

어학연수로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오면 호기심을 충족시킨 충만함은 생기겠지만 실질적 가난은 

변치 않을 것이고 궁핍으로 인해서 "괜히, 떠났다."는 자괴감으로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니 떠나든 남든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떠나면 6개월 후부터 가난해지고 안 떠나면 

1년 후부터 가난해진다.


물론 내가 어학연수를 안 가고 한국에 남을 경우 로또에 당첨될 수도 있을 것이고 재벌의 딸이나 부자 

미망인과 사랑에 빠져 팔자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건물이 붕괴되는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단지 6개월이라는 시간차 이외에는 내 인생이 크게 

바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까짓것 간다고 내 인생 별로 달라질 것도 없네!”

이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어학연수를 선택한다면 평소 가슴속에 응어리처럼 담겨 있던 영어에 대한 열등감과 외국에 대한 호기심은 

조금쯤 사라질 것이다. 거기다 외국 생활을 하다 보면 한국에서 할 수 없는 경험을 할 테니 그로 인해 내 

인생의 궤도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뭐가 될지는 몰라도 분명히 뭔가 변하기는 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학연수를 떠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일단 이쪽으로 마음의 가닥이 잡히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어려운 결정도 하고 나면 다음 문제들은 의외로 쉽게 풀린다. 방법론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의 세부 어학연수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마흔 살에 떠났던 나의 어학연수는 끝이 났다.

세부에 와서 처음으로 시험을 위해서가 아닌 언어로서 영어공부를 했다. 

어렵고 고단한 때도 많았지만 즐거운 시간도 많았다. 


무엇보다 영어가 시험의 대상이 아닌 소통의 도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한국에서 바다 건널 일이 생겨도 한 가지 두려움은 배제해도 된다. 

언어가 통해서라기보다 외국인에 대한 익숙함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족한 언어가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어학연수가 끝난 지금도 나는 자막 없이 영화를 보거나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고 오래 걸리지만 영어 동화책 정도는 

읽을 수 있다. 내가 조금만 더 기초가 있었다면, 조금만 더 독하게 공부를 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영어 실력이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부족한 부분이 많음을 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것들을 

채울 수 있는지도 알았다. 이 정도면 됐다. 지금은 여기까지다.


나는 내면의 호기심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다. 만약 이런 나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평생 “그때 그거 해 볼걸?”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지만은 않다. 

내가 지나온 이 발자국들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음을 잊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시간은 흘러가고 추억은 쌓여가고 인연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나 

스스로가 내 인생의 주체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 누가 내 삶에 관심이 있겠는가?

내 삶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  

타인이 내 삶에 나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진다면 그건 위험한 일이다. 

그건 가족이라도 마찬가지다.


내 삶을 움직이는 사람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이라 믿는다.




         INVICTUS

                               - William Ernest Henley


Out of the night that covers me,

Black as a pit from pole to pole,

I thank whatever Gods may be

For my unconquerable soul.


In the fell clutch of circumstance

I have not winced nor cried aloud

Under the bludgeoning of chance

My head is bloody but unbowed.


Beyond this place of wrath and tears

Looms but the horror of the shade

And yet the menace of the years

Finds and shall find me unafraid.


It matters not how strait the gate,

How charged with punishements the scroll,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온통 칠흑 같은 암흑

억누를 수 없는 내 영혼에

신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라도 감사한다.


잔인한 환경의 마수에서

난 움츠리거나 소리 놓아 울지 않았다.

내려치는 위험 속에서

내 머리는 피투성이지만 굽히지 않았다.


분노와 눈물의 땅을 넘어

어둠의 공포만이 어렴풋하다.

그리고, 오랜 재앙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문이 얼마나 좁은지

아무리 많은 형벌이 날 기다릴지라도 중요치 않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만든 '넬슨 만델라'의 일화를 그린 영화

‘인빅터스(Invictus, 2009) The Big Short, 2015)'에 시의 마지막 문장이 

인용됐었음. 넬슨 만델라는 실제로 이 시를 매우 좋아했다고 함.)




이 시가 매 번 흔들릴 때마다 큰 도움이 됐다.

정신승리에 불과할지 몰라도 선택할 수 있을 때 선택하는 것이 후회가 없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준 시다.

선택을 위한 두려움이든 현실의 안정을 위한 충만감이든 지나고 보면 어차피 모두 잊힌다.


결국 인간은 현재를 산다.

그래도 내겐 또다시 이런 결정을 할 시기가 올 것이고 그때도 똑같은 두려움에 빠질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여기 적어 둔다.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이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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