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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l 01. 2021

#47. 마지막 여행

혼자 떠나는 길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47. 마지막 여행 - 혼자 떠나는 길



(1일 차)

Moalboal, Cebu

모알보알의 밤이 깊었다. 혼자서 게스트하우스 침대에서 첫 밤을 보낸다. 

구석 쪽 침대에는 말레시아에서 온 커플이 자리를 잡고 있고 한쪽 구석에는 캐나다 청년이 

엎드려서 잠들어 있다. 말레시아에서 온 커플은 남자는 일본 사람 여자는 말레시아 사람이다. 

여자가 본인은 바이올린 리스트라고 소개했다. 인사를 하고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말레이시아 커플


캐나다 청년, 데이비드


캐나다 청년은 등짝이 새빨갛게 타서 눕지를 못한다. 지금 세계일주 중이라고 한다. 

모터사이클로 세부 섬을 일주 중이고 내일이면 북쪽으로 떠날 거라고 한다. 

가는 나라마다 오토바이를 빌려 그 나라를 여행을 한다고 했다. 

나는 세부 오기 전에 오토바이로 전국일주를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데이비드가 무척 부러웠다. 

오토바이 세계 일주는 내가 제일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다. 


잘생겨서인지 게스트하우스 패밀리 룸에 묵고 있는 현지인 가족의 딸 둘이 청년에게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것마저도 부럽다.

모알보알 게스트하우스


나는 지금 모알보알의 게스트하우스에 있다. 

게스트하우스는 1층은 로비 및 주방, 2층은 한 개의 큰 믹싱 룸(남녀 함께 쓰는 방)과 

2개의 패밀리 룸 그리고 욕실로 구성되어 있다. 침대 하나 가격은 1박에 300페소 우리 돈 

약 7000원 정도 된다. 밥은 주방을 이용하거나 알아서 해결해야 하고 샤워와 화장실 

사용은 무료다.



혼자서 모알보알을 다시 온 이유는 동네 사람들의 사진을 주기 위해서였다. 

지난번 여행을 마치고 사진 정리를 하던 중 이곳 동네 사람들의 사진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사진이 잘되면 인화해서 선물하는 취미가 있다. 인물사진인 경우는 뽑아서 싸구려라도 

액자에 넣어 선물하면 대부분은 좋아한다. 






한국에서 각종 행사에 많은 축의금을 낼 수 없던 나로서는 사진 선물은 욕을 덜 먹는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오늘 낮에는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전달했다. 사진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좋아했다.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 주는 나도 기분이 좋았다.



저녁을 먹고 동네 산책 중에 이탈리아 다이버와 일본 청년, 현지인 다이버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일본 청년은 다이빙 자격증을 따러 왔다고 하고 이탈리아 다이버는 자주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일본인 청년이 더듬대는 영어로 스쿠버다이빙과 세부에 대해서 물어본다. 이탈리아 청년과 현지인 

다이버 강사가 신이 나서 다이빙에 대해서 자랑을 한다. 나도 오픈워터 자격증 따느라 몇 번 다이빙을 

경험이 있으니 옆에서 아는 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광란의 노상 디스코 텍 ^^)

밤이 깊어지자 동네 한쪽 편 공터에 디스코텍이 열렸다. 음악소리가 시끄럽다. 

사람들의 발길을 따라 동네 구석으로 가보니 노상 디스코텍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각국 나라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거기서 ‘헬렌’을 만났다. 헬렌은 한국인이고 다이빙 강사였다. 

헬렌이 일하는 다이빙 샵은 내가 묵는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 건물이었다. 

밤이 늦어 디스코텍을 나서 함께 헬렌의 숙소인 다이빙 샵 까지 걸어왔다.


헬렌은 고등학교까지 태권도 선수생활을 했고 졸업 후에는 대기업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직장생활을 3년 정도 하다가 스쿠버다이빙 동아리에 들게 됐는데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세부를 몇 번 왔었다고 한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걸 계기로 적극적으로 다이빙을 하게 됐고 

급기야 지금은 직장을 정리하고 여기로 들어왔다고 한다.


Hellen


한국 떠난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만약 떠나지 않았다면 더 후회했을 거예요. 

갇혀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이런다. 


공부도 하고 다이빙 자격증의 레벨도 올려서 뉴질랜드나 호주 쪽으로 갈 생각이라고 했다. 

돈 버는 것은 그때보다 못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보다 마음은 훨씬 편하다고 한다. 

모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헬렌과 늦게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니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2일 차)

다음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캐나다 청년이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인사를 한다. 

함께 로비로 가서 주인장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제 게스트하우스에 말레시아 커플과 나 그리고 패밀리 룸에 묵고 있는 현지인 가족밖에 남지 않았다. 

말레시아 커플도 오늘 오후에는 떠난다고 했다. 그럼 여기 큰 믹싱 룸에는 나 혼자 남는다.


내가 빌린 Honda XRM125


오후에는 오토바이를 빌려서 동네를 돌아다녔다. 

사진도 찍고 지난번에 못 가 본 가와산 2 폭포와 3 폭포 탐험도 했다. 

해변 도로를 따라 시골길을 달리다가 멈춰서 군것질도 하고 바닷가에서는 

동네 아이들과 물놀이도 했다. 지나가다 동네 아이들과 사진도 찍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오니 캐나다 청년과 말레시아 커플이 떠난 자리에 

떼거지(?) 여행객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다. 아일랜드 젊은이들이다. 

내게 모알보알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아는 대로 답을 하고 지도를 보면서 설명도 해줬다. 

다이버는 아닌 것 같았다.


아일랜드 청년들


다음 날 아침이 되니 이것들이 이 모양으로 잠을 자고 있다. 

원래 게스트하우스 믹싱 룸에는 “Forbid Sex”이런 푯말이 붙어있다. 

혼숙이나 섹스가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날도 덥고 침대도 작은데 저렇게 붙어 자면 불편하지 않을까? 

(부럽...^^;;)


(3일 차)

참치 낚시


마지막 날은 오전에는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해변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컴퓨터로 사진 정리를 했다. 이제 모알보알의 생활이 익숙하다. 카페 옆 해변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이고 있어 가보니 동네 사람들이 

나가서 낚시로 참치를 잡았다고 한다. 식당 사장들이 모여서 그 참치를 흥정하고 있었다. 내가 옆에서 

구경하는 걸 보고 식당 사장하나 가 저녁에 자기 식당으로 참치구이를 먹으러 오란다.


참치 구이로 저녁을 먹고 잠깐 밤 수영을 했다. 

달빛이 비치면 밤에도 물속에 물고기가 보인다.

한국에서 할 수 없었던 것들, 한국에서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실컷 하고 싶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한국을 떠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답이 궁색하다. 

그래서 이런 질문에는 아예 답을 피하게 된다. 못 들은 척...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눕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내 삶에서 다시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이번에 혼자서 여행을 떠난 이유는 세부에서의 일을 정리할 시간을 갖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내가 쓰는 영어가 실제로 사용 가능한지가 알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6개월에 걸쳐서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스파르타 학원에서 하는 것처럼 독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한 나의 영어 공부가 정말 현실에서 통할까? 이걸 시험해 보고 싶었다. 

영미권의 나라로 가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여건이 안 되니 여기서 마지막 테스트를 해 볼 

밖에 없었다. 그래서 혼자서 길을 떠난 것이다.


사흘간의 여행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했다. 

여행지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 1분이면 친구가 된다. 

나는 그들과 인종과 종교,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대한 토론을 하거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민주주의와 독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다.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 일상적인 대화와 시답잖은 농담들을 했을 뿐이다. 

그 정도를 하는데 내 영어가 크게 지장은 없었다. 내가 못 알아들을 때도 많았지만 

그럴 때는 그냥,


“(Sorry, I cannot understand very well.) Again please.

(English is not my native language.) Tell me easily.”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이 말을 듣고 대화를 끊거나 정색을 하는 사람들과는 나도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았다.


비 영미권 사람이 영어를 유창히 못한다고 인상 쓰는 정도의 지적 수준이라면 이야기를 길게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영어로 농담 한두 마디는 할 수 있다. 상대가 쉬운 영어로 말을 

이으면, 


“야, 너 영어 잘하네!(Wow!! You're good speaker!, Smart guy!! )” 

하는 식으로 농담을 섞어서 대화를 이어갈 수도 있다. 

이러다 보면 쉽게 친해졌다.


실제로 나는 아일랜드 청년들과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많이 친해졌다. 

물론 그래 봐야 여행지의 스치는 인연이지만 같이 있는 동안 즐거웠다. 

사진도 많이 찍어줬고 이메일로 잘된 사진들은 보내줬다.



이 정도면 됐다. 내가 세부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다. 

지금 와서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걸 후회해 봐야 소용도 없다. 

내게 주어졌던 시간은 다 끝났다. 내일 학원으로 돌아가면 한국으로 출발이 이틀밖에 남지 않는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6개월 간의 어학연수라는 뭔가 거창한 일을 한 것 같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고 나 자신이 크게 변한 것 같지도 않다.


혼자서 세부에서의 생활을 정리한답시고 여행을 왔지만 와서 보니 정리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혼자 놀고 싶었을 뿐이다. 


인생이 정리한다고 정리되겠는가? 삶을 정리해 주는 것은 시간밖에 없다.

그러니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본인의 몫이고 결과는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될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당장 묵을 곳도 없다.

앞이 막막하다.


"그럴 거면서 왜, 떠났어?"라고 누가 물으면 큰일이다. 

대답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르겠다.

살아간다는 게 뭐, 이런 거 아닌가?

무언가 준비하고 만들어 가는 거...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 강해진다." 

이렇게 자위하면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 짓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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