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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l 03. 2021

#49. 에필로그

#30. 에필로그..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49. 에필로그..


한국으로 돌아와서 6개월이 지났다.

내가 없어도 한국은 평온했고 세상은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6개월이나 한국을 비웠음에도 내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시 이 사회에 섞여 드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서울에 어렵게 등 붙일 곳을 마련하고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직장을 구했다.  

그리고 밤에 운전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밤 10시쯤 회사가 끝나면 11시에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출근을 했다. 

거기서 생물(生物-수산물)을 트럭에 싣고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의 

길차(지방으로 가는 화물운송 차량)로 배달하는 일이었다.

돈이 필요하기도 했고 일자리를 구해준 지인의 부탁이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시장에서는 인건비 부담 때문에 밤에 일하는 정직원을 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노량진시장에서 일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오면 새벽 3시 정도가 됐다. 

일이 끝나고 조금만 미적거려도 동틀 때쯤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본업은 오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시간상으로는 여유가 있었지만 낮에 시간이 많다고 

피로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피곤에 절어 있었다.


가락동 시장의 길차(지방으로 가는 화물운송 차량)는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 

그래서 늘 먼저 가서 기다려야 했다. 처음에는 시장 구경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이것도 며칠이 지나니 지루해졌다. 그래서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영어 동영상 강의를 보기 시작했다. 

잊히는 영어가 아쉽기도 했지만 영어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묘한 일이 일어났다. 사고라고 해야 하나?


그해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왔다. 연일 폭설이 쏟아져 서울의 도로들은 쌓인 눈이 얼어붙어 엉망이었다. 

밤에는 제설작업이 안 되니 문제가 더 많았다. 도로 상황이 이래도 길차는 무조건 출발한다. 

이 말은 노량진시장에서 보내는 생물(生物)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락동 시장에 제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뜻이다. 잘은 몰라도 제때 물건을 보내지 못하면 노량진시장의 가게가 큰 손해를 보는 것 았다.


눈이 많이 온 어느 날이었다. 차가 노량진시장을 빠져나오지도 못할 만큼 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생물을 가득 실은 1톤 트럭을 어렵게 운전해서 겨우 올림픽대로에 올렸다. 도로 구석에는 눈이 

허리에 육박할 정도로 쌓여있었고 편도 4차선 도로 중 2개 차선만 차들이 다닐 수 있었다. 

당연히 도로에는 차가 하나도 없었다. 도로 통제를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차를 끌고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형편이 이래도 일은 해야 하고 돈은 벌어야 하니 어렵게 가락동시장까지 가서 짐을 넘겼다. 

사실 도로에 차가 없으니 생각보다 운전이 어렵지는 않았다. 


가락동 시장에서 을 마치고 노량진으로 돌아오는 길에 깜박 긴장을 늦췄던 것 같다. 

트럭은 짐을 실은 태에서는 차체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눈길에서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짐이 없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짐칸이 가벼워서 뒷바퀴가 노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갈 때는 무게 때문에 아무 문제 없이 갔었기에 올 때도 똑같은 패턴으로 전을 는데 올림픽대로에 

쌓인 눈이 내 차를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여의도가 눈앞에 보일 때쯤 갑자기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핸들이 먹지를 않았다. 

“앗!”하는 순간에 차가 90도로 꺾였고 가드레일 쪽으로 미끄러졌다. 

브레이크도 안 먹고 핸들도 말을 듣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차를 가드레일로 밀고 가는 느낌이었다.  

차가 멈추지 않고 가드레일 쪽으로 미끄러져 가는 걸 보며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기어를 낮추며 죽으라는 심정으로 핸들을 꺾으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반응에 관계없이 차는 계속 미끄러지다가 도로 한 가운데서 180도로 회전을 했고 꽁무니가 

가드레일을 치면서 멈췄다. 차가 한 바퀴 반 돌아서 도로의 진행방향 반대로 빙글 돌아서 선 것이다. 

뒤따르는 차라도 있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것이다. 


차가 멈춘 후 내려서 가드레일과 부딪힌 뒤를 확인했다. 문제는 없어 보였다. 

가드레일 쪽에 눈이 많이 쌓여서 완충작용을 해서인지 긁힌 흔적조차 없었다. 

게다가 시동도 꺼지지 않았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올림픽대로에서 차가 길의 반대 방향으로 서서 가드레일에 붙어 상향 등을 켜고 있으니 운전자들이 

당연히 놀랐을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아무 일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차를 서서히 움직여 

원래 방향대로 돌렸다. 도로가 미끄러워 핸들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계속 서있는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렵게 차를 움직여 겨우 노량진시장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시장 사람들과 

평소처럼 커피를 마시고 잡담을 나누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가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올림픽대로에서 차가 회전할 때 장면을 또렷이 기억한다. 

차가 가드레일을 치고 설 때까지의 과정과 서있는 차를 둘러보며 담배를 피우던 내 모습을 하늘 

위에서 바라본 것처럼 입체적인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잊히지가 않는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나는 신기할 정도로 여유 있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사고처리능력이 뛰어나거나 강심장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때의 느낌은 그런 것과는 약간 달랐다. 

사고가 내 목숨을 빼앗아갈 만큼 험했음에도 당시 나는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뭔가 귀찮은 일을 하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왜, 사고는 나고 지랄이야?” 이런 혼잣말을 했던 것 같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부터 나는 이것저것 일신상의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쓰지 않는 은행 계좌를 없애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팔아치웠다. 

해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체크카드와 허증 등을 만들었고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세부(Cebu, Philippines)로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명목상 2차 어학연수라는 구실로 한국을 떠났지만 이번에는 영어공부가 목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아예 없었다. 학원도 한 달만 등록을 했다. 

학원 규정상 안 되는 일이었지만 학원 형편이 어려워서인지 원장이 등록을 받아줬다.


사실 이건 어학연수도 아니었다. 세부 생활을 시작할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한 달간 학원에 머물면서 뒷일을 준비했고 4주 후 학원을 떠나 마틴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마틴은 캐나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세부에 들어와 정착해 있었다.) 

이렇게 내 인생의 두 번째 세부 생활이 시작됐다.



솔직히 올림픽대로에서의 그 사건이 내가 한국을 떠난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당시의 나는 피곤함과 지겨움에 찌들어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우울증 환자의 모습이었다. 


살면서 죽을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로 여기 계속 살다가는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무의식을 뚫고 나왔던 것 같다. 래서 떠날 결심을 했고 미련 없이 떠났다. 그리고 

세부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세부에 살고 있다.


아직은 그때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가치가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산다면,

인생은 살아 볼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다.


(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 어학연수' 연재를 마칩니다.)





덧)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있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딴지일보'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원본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져 기록을 위해 여기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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