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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n 30. 2021

#46. 졸업식

살아간다는 건 지고 갈 짐이 늘어난다는 것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46. 졸업식...


나는 오늘 졸업식을 한다. 

보통 학생들은 졸업식 날 수업에 참가하지 않는다.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하루 종일 방 밖으로 나오지 않거나 낮에 학원을 나가서 

아예 돌아오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 솔직히 사설학원 졸업식이 뭐가 중요한가? 

졸업식 참가는 순전히 본인의 몫이다.


나는 졸업식 날도 4교시 마지막 수업까지 모두 출석을 했다. 

수업에 빠진다고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나는 입학식 때부터 졸업식도 

수업의 연장으로 여겼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험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졸업식을 충실히 준비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로비로 내려가니 사무실 직원들이 졸업식과 입학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과 프레젠테이션 장비를 연결해서 테스트를 해봤다.


졸업식 때는 해당 졸업생과 친하게 지냈던 학생이나 선생들이 축사를 하고 학생들은 간단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사람도 있고, 연설만 하고 끝내는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는 마이클 선생에게 축사를 부탁해 놨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과 노래를 준비했다. 

그동안 준비했던 “Making love out of nothingat all”을 드디어 오늘 부르는 날인 것이다. 


오늘 졸업 인원은 6명인데 3명은 졸업식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졸업생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나 때문에 늦게 끝날까 봐 걱정이 됐다. 졸업생이 준비한 것을 조금만 길게 해도 행사 시간은 

2시간이 훌쩍 넘어 버릴 것이다. 이런 행사가 길어져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참가 인원이 작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메인 행사인 졸업식이 시작됐다. 

내 앞의 두 명은 짧게 연설만 하고 끝났다. 연설 후 1:1 선생과 학우들이 축사를 했고 합창으로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내 순서가 되어 마이클 선생이 축사를 했다. 

축사가 끝나고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출발 전에 찍었던 사진에서부터 선생들의 사진, 함께 공부한 학우들의 사진,

여행 중에 찍은 사진 등을 화면에 띄우면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나는 처음부터 아예 원고를 만들지 않았다. 영어로 원고를 작성할 능력도 안 됐지만 글을

읽으면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은 더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원고는 사진에 맞춰 

대충 목차만 작성했고 그것을 보면서 떠오르는 대로 영어로 말했다. 틀린 말이 많았지만

내용을 전달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가끔 선생들이 농담 같은 질문을 던졌고 나는 여유

있는 척 답변했다. 선생들은 자신의 사진이 화면에 나오면 웃으면서 무척 좋아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시간이 길어지자 자리를 뜨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손뼉 치며 

웃어주는 사람도 많았다. 마지막에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을 부르고 내 순서를 

마쳤다. 노래 부를 때 모든 선생들이 합창을 해줬다. 학원에 오래 있다 보니 학생들 보다 선생들과 

더 친해진 것 같다.


행사가 끝나고 졸업장 수여식이 있었다. 통상적으로 졸업장은 선생들 중 가장 연장자인 프랭크 선생이 

수여한다. 프랭크 선생이 짧게 연설을 하고 졸업장 수여식을 했다. 연설에 내 이야기가 잠깐 섞여있었던 

것 같다. 지난 6개월 간 나는 프랭크의 1:8 수업에 가장 열심히 참가한 학생 중 하나였다. 내가 졸업을 

하고 나면 프랭크는 1:8 수업시간에 혼자 TV 드라마나 보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졸업장을 받고 프랭크 선생과 기념 촬영을 했다.



졸업식이 끝나자 스캇이 옆에 와서 “형님, 나가서 한 잔 하셔야죠?” 한다. 

나는 외출하지 않겠다고 했다. 스캇은 “또, 그런다.”하고는 웃으며 아이들과 밖으로 나갔다. 


나는 프랭크, 마이클 선생과 학원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프랭크 선생이 “멋진 졸업식이었다.”라고 상투적인 농담을 던진다. 

멋쩍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늘은 졸업생도 많았고 입학생도 많았다. 

대부분 회식을 하거나 금요일 밤을 즐기러 나갔을 것이다. 식당과 휴게실에 사람이 거의 없다. 

나는 이렇게 조용한 옥상 휴게실에서 밤 풍경을 보면서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해주는 밥 

먹으면서 공부만 하면 되니 이 보다 편한 일이 있겠는가? 


밤거리를 바라보며 이제 이것도 마지막이다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올라왔다. 

식사가 끝날즈음 마이마이를 비롯한 도우미들이 식당에 청소를 하러 들어왔다. 

그들과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졸업식도 했고 수업 일정도 모두 끝났다. 이제 학원에서 공식적으로 할 일은 하나도 남지 았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는 일주일 정도 여유가 있다. 원장이 출발 때까지 방을 쓰라고 해서 출국일까지 

방은 비우지 않아도 된다. 월요일에 세부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이번에는 혼자서 여유롭게 

다녀 볼 생각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와서 이삿짐 정리를 했다. 

정리를 하다 보니 짐이 꽤 많이 늘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올 때는 여행가방 하나 달랑 들고 왔는데 지금은 그 가방을 가득 채우고도 

박스가 두 개나 더 나왔다. 옷가지는 아직 정리도 하지 않았다.


고작 6개월 살았던 곳인데 뭐가 이렇게 많이 늘었을까? 신기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지고 갈 짐이 늘어난다는 뜻인가 보다.


“내일은 나가서 가방을 하나 사 와야겠다.”

생각을 하며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다시 일어나 불을 켰다.


그리고 박스와 가방을 열어 바닥에 쏟았다.

엄청나게 많은 잡동사니들이 방 한가운데 쌓였다.


그걸 보고 알게 됐다.


“음~~ 가져갈 건 별로 없구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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