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위의 방랑자]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해무
장마가 찾아온 요 몇 주간, 창밖의 바다는 희뿌연 안개로 뒤덮여 마치 애초부터 바다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 푸른 모습을 감췄다. 안개는 다시 창문 코앞까지 다가왔다가 사라짐을 반복하고 그렇기에 그 안의 풍경 또한 귀퉁이를 드러내다 활짝 열렸다가 닫히기도 했다. 해무가 찾아오는 것은 흔한 나날이지만 이토록 자주, 깊게 해무가 드리운 건 이번 여름 장마가 유독 그러했다. 15층의 높이에서 바라보는 해무는 안개와 비슷하다. 다만 오랜 시간을 두고 머무르는 듯한 안개와 달리 해무는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몇 차례 반복한다. 또한 그 깊이감에도 매번 차이를 보이며 어느 때에는 얕은 구름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에는 아득히 먼 뿌연 수평선으로 보이기도 한다.
딸아이는 해무를 보면 ‘바다안개, 해무’라는 표현으로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탄성을 내기도 했다. 아이의 시각에서 해무는 무섭다기보다는 신기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그림같이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반면, 어른의 시각에서 나에게 느껴지는 해무는 긴장을 안고 있는 일상의 고요함과 비슷했다. 이 고요함은 때론 아주 긴장감이 옅돌만큼 가까운 곳에서 시야를 막음으로 다소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조용히 스미듯 나를 온통 감싸 안아 오히려 불안함으로 둘러싸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가장 자주 느끼는 불안감은 상실에 관해서였다. 아이와 차를 타고 갈 때, 혹은 아이를 멀리 견학 보내야 할 때, 아이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할 때 등등. 여느 부모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아이에 대해서 과잉보호의 부모가 되는 것만 같았다. 세돌이 지난 딸아이를 분리수면하지 않고 끼고 자며 아이가 내게 붙어 자는 것처럼 나 또한 아이가 없으면 허전하다는 것. 더하여 갑작스레 아이가 내 품안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내 내면에 항상 존재했다.
나는 이러한 상실에 대한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경험한 두 번의 유산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싶었다. 몇 주간 경험하는 임신과 유산의 시간은 멀리 보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안에서는 참으로 많은 감정과 생각이 떠밀려오기도 하는 시간이다. 생명을 잉태하는 기쁨, 그리고 생명을 떠나보내는 허망함. 그 양극 안에서 헤매는 동안 당시엔 담담하게 느껴졌지만 돌이켜보면 내 안에 깊게 상처가 박힌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새까만 허망함과 슬픔이 두려워 아이에 대한 실제 하지도 않은 상실을 불안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이와 등원차를 기다리며 바라본 해무의 이면.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해무는 낮의 은하수처럼 그 안에 그것만의 물의 빛을 안고 흘러갔다. 해무는 산을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들을 깨끗하고 평화로우며 의연하게 지나쳐갔다. 불안해 보이던 해무의 이면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나는 이내 사유해 본다. 하루하루가 무탈하고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난 그저 이 행복한 일상에서 해무 안에 갇혀 길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구나. 결국 내가 불안한 이유는 아이와 함께하는 이 더없이 풍족한 행복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렇기에 두려워하기보단 이 행복감에 감사하고 겸손하게 하루하루를 두 손 정성스레 받아 드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었다.
난 어느 방랑자처럼 안개 안에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불안함의 의미를 알며 그것을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생의 여정에 해무가 찾아와 딸이 나를 찾을 때 나는 항상, 언제나 너의 곁에 있을 것이니 ‘부디 너의 삶에 겁내지 말길’이라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해무처럼 종잡을 수 없는 안개가 가득하고 손가락을 차분히 움직일 수 없으며 시선이 또렷해지지 않는 불안함이 마음으로 기어들 때, 나의 딸이 나와의 시간들을 생각해 주고 이로 말미암아 해무 아래의 아름다운 안개의 흐름을 느끼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불안한 안갯속에도 평안히 흘러가는
이 삶은 기쁜 것이다.
분명히 기쁨이 더욱 많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