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르네마그리트
세상이라는 건반
피아니스트는 천재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었다. 배에서 태어나 피아노를 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점점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배에서만 살아왔던 피아니스트는 결국 배 밖의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피아노, 그리고 배와 함께 바닷속 깊이 가라앉는다.
“피아노를 봐.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지. 그건 무섭지 않아. 무서운 건 세상이야. “
그가 몇 걸음만 더 나아갔다면 밟을 수 있었던 육지. 그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거대한 도시를 마주했다. 피아니스트는 세상에 비친 수백만 개의 건반을 보았다. 그것은 그가 칠 수 없는 것들이었고 그는 두려움에 세상을 나갈 수 없었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에서의 이 주인공의 이야기는 자신만의 삶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해 준다. 천재적인 재능과 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용기가 없다면 그 재능과 명성마저 바닷속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요즘 급변하는 시대에서 우리 세대와 후세대가 마주한 두려움과 비슷할 것이다.
내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학생들은 가끔 나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중 대부분은 진로에 관한 고민에 대한 것이었다. 난 당시 학원에서 영어강사일을 하며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기에 학생들의 눈에는 그것이 특별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조언을 시작할 때마다 덧붙였다.
“나의 세대가 살아가는 시대와 너희가 살아가는 시대는 분명히 다르다.”
가령 시각디자인 분야만 해도 십 년을 주기로 트렌드가 바뀌고 논문에서 주로 이슈가 되는 것들은 그보다도 더 빠른 주기로 바뀐다. 내가 석사졸업 때 쓴 인터랙션디자인 분야에서의 논문은 졸업 후 학회에 제출하기까지 5개월이 걸렸는데 이 과정에서 또한 이미 존재하는 이슈가 있을까, 서둘러 준비했었다. 때문에 현재 존재하는 좋은 직업군이 과연 십 년 후에도 그럴까, 그것은 모를 일이다. 이미 2030년에는 현재 존재하는 직업군의 70퍼센트가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군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내 아이는 곧 세돌을 앞두고 있다. 아이는 이미 유튜브키즈를 스스로 조작하며 보고 싶은 영상을 시청하고 일정 시간이 되면 본인이 전원을 끄고 정리하는 등의 습관을 가지고 있다. 전자펜을 보면 그것으로 책을 눌러보며 당연하다는 듯 책에서 나올 음성을 기다린다. 직업군이 뒤바뀌는 2030년, 때는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시기인데 이미 현 초등학교의 교과서는 태블릿과 인터랙션을 활용한 전자교과서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한다. 부모로서 세상과 교육의 변화를 어떻게 발맞춰 나가야 할지 고민이 되는 시점이다. 다행히 나의 남편은 새로운 기술과 변화에 민감하고 그것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이기에 아이가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나보다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존의 것을 뒤로 미뤄두고 신세계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떼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일 것이다.
“우주에는 달이 한 개뿐이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달을 본다.”
중절모에 단정한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는 홀로 외딴 황무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을 향하는 곳은 저 멀리 어둡고 희미한 집들이 있고, 하늘에는 그믐달이 떠 있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하현달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듯하다. 하지만 신사의 뒷모습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 신사가 바라보는 달과 그가 앞으로 나아갈 선택이다.
연초가 되면 쏟아지는 향후의 트렌드와 미래를 보고하는 내용의 책들이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 역시 우리 모두가 이 과도기의 시기에서 미래를 조금이나마 통찰하고 중절모의 신사처럼 본인과 가족이 바라보는 달의 방향을 찾기 위함일 것이다.
지난 3년간의 육아에서는 당장의 오늘내일에 집중했다면 나 또한 점점 인지가 높아지고 원하는 것이 분명해지는 아이를 보며 아이의 미래에 내가 어떤 부모의 모습이 될 수 있을지, 그리고 아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지 생각한다.
우리의 갈림길은 피아니스트가 마주한 육지와 배 사이의 발걸음과 같다. 눈앞의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건반 삼아 우리의 삶을 연주할지, 아니면 평생 머무른 기존의 것과 함께 배에서 침몰할지. 아이를 육아하는 부모로서는 새로운 세상 안에서 우리만의 연주를 해나가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만의 달을 바라보는 것을 염두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두려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설레이는 일이기도 한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우리 아이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거야. 기대되는데?"
라는 남편의 말처럼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우리가 학창 시절 그림으로나 그렸던 미래사회의 모습과 흡사할지도, 어쩌면 그보다 더 멋질 수도 모른다. 다가오는 새해를 앞두고 올한해를 마무리하며 더욱 성장할 아이와의 미래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