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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이 Nov 19. 2024

피어나

[산책] 마르크 샤갈

피어나



  초여름의 주말, 햇빛은 뜨거웠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빛이 반짝이는 넓은 정원이 펼쳐진 한 카페에서 나비와 꽃, 흐르는 계곡물을 보며 우리는 나들이를 즐겼다. 남편은 아이를 위해 비눗방울을 연신 불어주었고 아이는 비눗방울처럼 투명하고 알록달록한 웃음을 지으며 방울을 따라 뛰어다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 고소한 냄새에 줄지어 주차된 차들을 보며 우린 한 식당에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정신이 없는 분위기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앉아 도란도란 음식을 먹고 있었고 우리 세 가족도 간신히 자리를 잡아 앉았다. 곧이어 아기의자를 가져와 딸아이를 앉히자 딸아이보다 한 살 차량 많아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딸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이는 아기의자에 앉아있는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 하고 손을 만지기도 하며 인사하는 것이 딸과 놀고 싶은 모양새였다. 때문에 그 아이는 식당 안에 유일한 또래였던 딸아이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고 딸이 앉아있는 아기의자를 흔들기도 했다. 그 아이는 그 식당주인의 손자, 그리고 서빙을 하고 있던 한 여성의 아들인 듯했다. 우리말이 서툰 것 같았던 그 여성은 우리 쪽을 보며 아들에게 그러지 말라는 시늉을 했지만 바쁜 응대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사실 나는 딸아이가 방해받지 않고 점심식사를 맛있게 먹길 원했고 당연히 나 또한 편안하게 식사를 하고 싶었기에 그 아이의 행동이 ‘아이’가 할만한 행동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다소 거슬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도무지 갈 생각을 하지 않아 난감했고 무엇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내 관대하지 못한 성격이 그 아이의 행동을 포용하지 못했다. 결국 주문한 메뉴가 나올 때까지도 딸 옆에 있는 아이에게 나는 딱딱하게 ‘이제 엄마에게 가봐.’라고 얘기했다.


  “엄마가 너무 바빠서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구나.”


  그때 남편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문득 나는 남편이 보인 따스한 행동과 말에 놀랐다. 아이는 남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남편의 관심이 좋았는지 갑자기 다른 테이블에 있던 전단지와 신문 등을 남편에게 가져와 보여주며 배시시 웃었다. 그저 아이에게 필요한 건 사소하지만 다정함이 깃든 관심이었던 것이다. 곧 아이의 엄마가 요구르트를 아이에게 내밀며 데리고 갔고 우리는 그제야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주문한 음식은 배추 전과 메밀막국수였는데 배추 전은 메밀반죽에 배추를 여러 겹으로 겹쳐 두툼하게 부쳐내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으며 메밀 막국수 또한 시원한 국물에 면발이 입안에서 쫀뜩하게 찰진 식감을 자랑했다. 딸아이 역시 처음 먹어보는 막국수였지만 입맛에 맞았는지 상당히 맛있게 먹는 듯했다. 나는 식사를 하는 동안 이렇게나 맛있는 음식들보다도 이 음식들을 ‘이토록 다정한 사람과 먹고 있구나’라는 것에 감사했다. 5년간의 긴 연애에서도 느꼈지만 결혼 후에도 내 남편은 한결같이 다정한 사람이다. 그 식당의 짧은 찰나에서 영화 ‘어바웃타임’ 속 ‘결혼은 반드시 다정한 사람과 하렴.’이라는 대사처럼 난 그런 사람과 매일을 함께 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아이의 그릇에 배추 전을 올려주고 막국수를 덜어주며 아이를 살피는 다정한 아빠임에 더 감사하기도 하다.  


  우리는 삶의 여정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지나치며, 단절되고 또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만나며 ‘너를 통해 나를 보고 나를 통해 너를 들여다보는’ 일상을 살아가고 동시에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순간순간을 맞이한다. 이어 상대의 고유성을 우리의 언어로 정의하고 우리만의 카테고리로 분류하며 우리의 환경 안에 들여놓는다. 하물며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연인이자 배우자라면 매 순간 상대를 통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따뜻한 언어로 정의하여 나의 세계에 맞이할 수 있는 그리고 나를 ‘관통’하여 볼 수 있는 것만 같은 사람을 우리는 쉽게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남편의 존재에 매일 감사하곤 한다.          


  “내가 벨라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마치 내 어린 시절과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 마르크 샤갈     


  이따금 아이와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아이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아이가 있음을 느낀다. 내가 가진 기질 및 습관이 아이에게 녹아드는 것. 이런 체화의 과정은 남편과 나 사이에서도, 아이와 부모인 우리 사이에서도 계속해서 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순간들은 우리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가족의 문화와 사랑의 창조를 유발한다. 샤갈이 벨라의 흔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생성했듯, 개인의 사회는 너와 나의 세상이며, 우리의 세상은 가족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나는 남편의 다정함이 나에게 체화되어 나라는 사람이 조금 더 다듬어지고 유해지길 바라곤 한다. 그만큼 아이에게도 이러한 다정함이 진하게 스며들어 아이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타인과 너그럽고 편안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믿는다.

우리가 그려가는 가족이라는 캔버스의 그림은 그날의 어여쁜 꽃과 나비, 맑은 광채를 머금고 비눗방울을 따라 순수히 뛰어다니던 딸아이의 모습처럼 매순간 피어나는 다정한 온기를 담아주리라고.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 온통 흰색으로 혹은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 마르크 샤갈     


마르크 샤갈의 '산책'. 1917~1918, 상트페테르부르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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