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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Nov 18. 2023

이 노래를 듣는다면 나에게로 와주오

-나의 옛날이야기




한 여자가 무대로 나온다. 반짝이는 드레스 차림이 아니다. 통 넓은 흰색 바지에 분홍색 스웨터를 입었다. 고불고불하고 짧은 파마머리다.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다. 노래를 하기 위해 무대에 선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배우 나문희 씨다.


동요를 부르려고 하는 어린아이처럼 두 손을 맞잡는다. 다시 풀고 뒷짐을 진다. 살짝 옷을 움켜쥔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피아노와 기타로 시작되는 전주가 부드럽게 흐른다. 그녀는 차렷 자세로 선 채 손으로 조심조심 박자를 맞춘다, 손등에 주름이 가득하다. 여든 살의 나이만큼 많다. 이윽고 노래를 시작한다.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지금도 난 기억합니다

사랑한단 말 못 하고 애태우던 그날들을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철없었던 지난날의 아름답던 그 밤들을

아직도 난 사랑합니다’


마치 앨범 속에서 오래되어 색 바랜 흑백사진을 꺼내 보듯이 부른다. 아주 오래전에 받은 연인의 편지를 다시 읽듯이 잔잔하게 부른다. 철없던 지난날이라면 젊은 시절이겠다. 그녀의 나이로 봤을 때 오십 년쯤 지난 시절의 이야기겠다. 그런데 그 시절 그 밤들을 아직도 사랑한단다.


물론 이 노래의 가사는 나문희 씨가 지은 것은 아니다. 조덕배라는 가수의 노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노래가 나오는 순간, 가사는 온전히 그녀가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가 되었다. 배우라서 표현력이 좋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표현력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검색해 보니 그녀가 어느 방송에 나와 남편과 결혼 전 덕수궁 길을 걸었던 얘기가 나온다. 2006년도에 그녀의 남편이 대장암이라는 큰 병을 앓았다고 한다. 마음고생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아마도 그녀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예전에 덕수궁 길을 같이 걷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젊은 사내였던, 그리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살다 지금은 백발과 주름이 가득한 남편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직 병상에 있을지도 모를 남편에게, 젊은 날의 연인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을까.


만약 남편이 그녀의 노래를 듣는다면 그녀처럼 그때를 떠올릴 것 같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름다웠던 시절의 풍경은 시들지 않고 끝끝내 다시 사랑으로 빛나므로.


‘이 노래를 듣는다면 나에게로 와주오

그대여 난 기다립니다


오늘 밤도 내일 밤도 그리고 그다음 밤도

영원히 난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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