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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Apr 16. 2024

낙화유수


꽃 피고 꽃 지고


며칠 동안 날이 무척 더웠다. 한낮에는 걷다 보면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 이제 겨우 사월 중순에 접어들었는데 길에는 반소매 옷을 입은 사람도 여럿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사는 아파트 담장을 따라서 핀 개나리꽃 노란색이 무색해 보였다. 꽃이 핀 자리는 높은 건물에 가려져서 볕이 잘 들지 않는 곳이다. 삼 월말부터 한두 송이씩 피기 시작했는데 열흘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꽃이 매달려 있다. 이미 잎도 나기 시작했다. 꽃에 가려 보이지도 않던 잎눈이 작은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게 돋았다가 엄지손가락 한 마디보다 커져 있다. 초록이 노랑을 밀어내며 번지고 있다. 휘늘어진 가지에서 밀려난 꽃은 길바닥에 흩어진다.


흔히들 봄은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라 한다. 새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 움직이는 때라는 뜻이겠다. 하지만 봄이라고 해서 살아있는 모든 것이 삶의 방향으로 가지는 않는다. 살아있음의 끝 쪽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오래전에 뇌졸중을 앓고 요양병원에 입원해 망백의 나이가 되어버린 환자에게 폐렴이 왔다. 며칠 전부터 고열이 있더니 숨소리가 거칠다. 그는 일 년에 한두 번씩 폐렴에 걸렸다가 약과 주사로 치료를 받고 회복하기를 십 년째다. 오랫동안 누워서 지내다 보니 엉덩이에 욕창도 몇 번 생겼었다. 패혈증이 와서 금방이라도 돌아가실 것 같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두 아들이 방문해서 아버지 손을 잡고 눈물을 보였다. 


사흘 전 출근하여 환자의 상태를 보고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며칠 동안 항생제를 투여해도 열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 기관지 내 분비물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지를 않았다. 무엇보다 산소를 공급하는데도 동맥혈 내 산소 수치가 정상보다 한참 아래였다. 나는 차분히 한 사람의 마지막을 지켜볼 준비를 하고 있었고 새벽에 도착한 둘째 아들도 먹먹한 표정으로 아버지 손을 한 번 잡을 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는 그 밤을 넘겼다. 눈을 뜨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면서 새벽을 맞이하고 낮을 버티고 다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왔다. 내가 퇴근할 때까지 그렇게 살아있음과 죽음의 경계에서 맴돌고 있었다. 


며칠 동안 날이 무척 더웠다. 이제 겨우 사월 중순인데 갑자기 여름처럼 더웠다. 그러더니 밤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어제 아침에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길에는 순식간에 작은 물웅덩이들이 생겼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담장 밑에도 물이 고인 게 보였다. 담장에 기대어 있던 개나리는 이제 꽃이 거의 다 지고 잎이 더 많다. 가지는 비를 만나 연두에서 초록으로 성큼성큼 변해가고 있었다. 몇 개 남지 않은 꽃 중 한 송이가 비에 흔들리다가 물웅덩이로 툭 떨어진다. 수면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만든 파문과 꽃송이가 떨어지면서 만든 파문이 합쳐진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가 만나 아주 잠깐 교차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사라진다. 


지구별 어느 땅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 빗물 고인 수면에 개나리꽃 한 송이 떠 있다. 먼 우주에서 떨어진 별처럼. 비가 그치면 비와 함께 다시 하늘로 스며들 노란빛 한 자락이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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