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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Jun 10. 2024

나에게 내주는 내 숙제


우울이 우울을 불러오던 시절이 있었어요. 


우울의 검은 색이 어둠을 만듭니다. 어둠이 나를 둘러쌉니다. 낮인데도 눈앞이 캄캄해지곤 했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어요. 배도 고프지 않아요. 배 속은 텅 비었지만 먹는 게 귀찮아요. 



하루 이틀 사흘, 이런 날들이 계속되자 더더욱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요. 그래도 출근을 해야 하는 날에는 일어나서 밥을 먹어요. 된장국에 밥을 말아 입속에 떠넣고 출근해요. 병원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해요. 병동으로 올라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거울을 봅니다. 변신을 시도해요. ‘자 이제부터는 간호사 최희정이야. 우울은 잠시 가방에 들어가 있으렴.’ 



퇴근길에 출근하기 전의 나와 퇴근 중인 나를 비교해봅니다. 운전석 위에 달린 조그만 거울로 나를 비추어 봅니다. 출근할 때보다 조금 생기가 있어요. 오늘은 집에 가서 어제보다 나를 조금 더 움직여볼까 하는 다짐도 해요. 하지만 집에 돌아와 나는 다시 우울로 가득한 어둠에 잠겨버려요. 대충 씻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이불 속으로 숨어요. 



이런 날들이 반복되던 때가 있었지요. 아무것도 하기 싫지만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시간이었죠.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해 보기로 해요. 출근할 때보다 퇴근할 때 조금이나마 의욕이 생겼던 순간이 떠올라요. 



‘아, 몸을 움직여야겠다!’ 일단 몸을 움직이는 일을 만들어요.
우울을 잊을 수 있는 일들이 필요하구나. 
버릴 수 없다면 잠시 닫아두기로 해요. 
그래서 내가 나에게 숙제를 만들어주기로 합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숙제를 만듭니다. 구체적인 계획의 좋은 점은 생각하지 않고, 생각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계획대로 몸을 움직이면 되거든요.



내가 나에게 내준 숙제는 ‘눈을 뜨면 밥을 싸 들고 무조건 밖으로 나가자.’였어요. 세수도 안 해요. 대충 옷만 갈아입어요. 그리고는 냉장고를 열고 반찬을 꺼냅니다. 꺼낸 반찬을 작은 통에 옮겨 담아요. 밥도 담아요. 갑자기 달걀 프라이도 하나 할까 하는 마음이 생겨요. 후라이팬을 달궈 기름을 두르고 치직치직 달걀을 부쳐요. 몸을 움직이자 나를 조금 더 챙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다시 몸을 더 움직이게 된 거죠. 작은 가방에 밥과 반찬을 챙겨 집을 나섭니다.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공원으로 가요. 씽씽 달려요. 벤치에 앉아 밥을 먹어요. 우걱우걱 밥을 먹다 눈을 들어보니 초여름의 분홍 장미들이 쫑알거려요. 


‘밥 먹고 커피도 마셔. 쪼기, 쪼오기, 자전거로 5분만 더 가면 네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잖아. 거기 가서 구름 카푸치노 한 잔 마시고 집에 가.’


아이참, 장미꽃이 독심술을 하다니. 흠흠. 꽃이 시키는 데로 몸을 움직여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셔요. 카페인을 충전했더니 정신도 맑아지고 눈빛도 초롱초롱해지네요. 



한 달쯤 이렇게 무조건 밖으로 나가기를 실천하자 우울이 옅어졌어요. 물론 그 당신 가지고 있던 복잡한 문제는 그대로였어요. 하자만 우울이 작아지자 신기하게도 문제도 작아 보였어요. 이 무렵 나는 내게 새로운 숙제를 만들어주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정해진 요일,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할 일을 만들기로 합니다. 



스케치북과 물감과 붓을 꺼내 들고 다시 그림을 그리러 갔어요. 그림그리기는 생각이 많을 때 좋아요. 생각을 멈추고 눈과 손에 집중하게 되거든요. 머리가 복잡할 때, 혹은 기분이 가라앉을 때 그림을 그려보세요. 꼭 화실에 가지 않더라도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눈에 보이는 대로 슥슥, 잘 그려야겠다는 생각 없이 슥슥 슥슥. 십 분이건 한 시간이건 그리다 보면 얽히고설킨 것들로 꽉 차서 어쩔 줄 모를 지경이던 마음에 작은 공간이 생기고 새로운 기분이 들어온답니다. 



머리가 복잡하고 기분이 가라앉고 몸이 자꾸 웅크릴 때, 
몸부터 먼저 움직였더니
무겁게 가라앉던 기분도 가벼워지고 머리도 개운해져요.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를 때에는
자기 자신에게 숙제를 주세요. 
복잡하지 않고 쉽게 재빨리 해치울 수 있는 숙제. 
결과물이 바로바로 눈에 보일 수 있는 숙제요. 



예를 들자면 사진찍기, 수첩에 그림그리기, 그리고 자전거 타기. 자전거 타기는 잡생각을 날려버리기에 아주 좋아요. 바퀴가 돌아가는 동안 만들어진 바람이 이마를 시원하게 해주면서 머릿속 먼지도 날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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