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여러분은 인생을 살면서 내 행복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나요. 이 문장을 적고 난 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는 딱 하고 떠오르는 게 없더라고요. 행복하게 만드는 몇 가지 것이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먹고살다 보면 지금의 행복은 조금 미뤄두잖아요. 마치 반드시 내일이 있다고 정해진 것처럼 말이죠.
오늘 소개할 영화의 주인공은 그런 게 무려 세 가지나 있었습니다.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모금,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였죠. 이는 그녀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일뿐더러 그녀의 인생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채워주는 것들입니다. 오늘은 월급 빼고 다 오르는 팍팍한 현실에서 자신만의 가치관을 지키며 사는 청춘 ‘미소'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소공녀’입니다.
3년 차 프로 가사도우미인 미소(이솜 분)는 일당으로 하루를 살아가는데요. 그녀의 가계부는 단출합니다. 밥, 위스키, 담배, 세금, 월세, 약으로 나눠진 지출 항목은 일당을 받는 동시에 정확하게 갈립니다. 새해가 되자 그녀의 지출에 균열이 오는데요. 이유는 담뱃값과 월세가 동시에 올랐기 때문이죠. 이것저것 줄여봐도 마이너스를 메꿀 길이 없던 미소는 여섯 가지 지출 항목 중에 과감하게 ‘집’을 포기합니다.
집주인에게 나가겠다고 통보한 후 곧바로 집을 정리하기 시작하는데요. 청소 도중 다락에서 대학 시절 밴드 생활을 함께했던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발견합니다. 미소는 그들에게 며칠 신세 질 요량으로 찾아 나섭니다.
그 시절 자유분방했던 친구들은 사회에 또는 상황에 순응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에 밥 대신 링거액을 맞아가며 일하는 문영(강진아 분). 시댁 식구들과 고시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에 나아지지 않는 음식 솜씨로 스트레스받는 현정(김국희 분). 결혼하면서 무리해서 새 아파트로 이사 왔지만 아내는 떠나버렸고 홀로 남아 20년 동안 대출금을 갚으며 살아야 하는 대용(이성욱 분)과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못하고 부모님께 얹혀사는 록이(최덕문 분). 마지막으로 부자 남편에게 시집갔지만 남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본래 모습은 감추고 사는 정미(김재화 분)까지.
친구들은 불쑥 찾아온 미소를 보며 ‘그 나이 먹도록 제대로 된 직업도, 집도 없이 사냐’며 충고 아닌 충고를 하는데요. 그때 던진 미소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우리는 보통 집을 위해 생각과 취향을 접어두는 경우는 봤어도 생각과 취향을 위해 집을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나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미소를 보며 대리 만족하기도 하고 부디 끝까지 현실과 타협하지 않길 응원하면서 보게 되었는데요.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전고운 감독은 이런 미소의 캐릭터에 대해 “집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버리며 사는 자신을 발견하고, 정반대의 인물이 보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집을 버리는 캐릭터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작은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향과 정반대로 사는 인물일지라도 그만의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만들어냈다”라고 전했는데요. 그래서인지 미소가 MZ세대에게 많은 지지를 얻은 것 같습니다.
미소라는 캐릭터 외에도 공감을 부르는 장면은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보증금이 저렴한 월세방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모습이나 웹툰 작가를 꿈꾸며 일을 병행하던 남자 친구 한솔(안재홍 분)이 결국 꿈보다 현실을 택하며 많은 돈을 준다는 해외 파견 근무를 선택하는 장면에서는 요즘 청춘들이 겪는 현실과 다르지 않아 서글퍼지기도 하죠.
영화 속에서 미소는 일이 끝나면 위스키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데요. 하나 남은 일자리마저 없어지고, 남자 친구도 떠나고, 위스키 가격도 올라버린 현실에서 미소는 끝까지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을지. 여러분도 위스키 한잔과 함께 영화를 즐겨보시는 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