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서 Aug 28. 2023

나의 선생님에게

그간 안녕하셨나요.
이렇게 또 몇 년간 전하지 못했던 안부를 전하네요. 벌써 한 해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이 지났어요. 바깥에 이는 바람이 부쩍 선선해졌어요. 같은 온도의 바람을 맞고 있을까요 우리는. 녹음 진 여름을 지나 가을이라니, 왜인지 가을 앞에는 어떠한 미사여구도 붙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가을’이라는 단어는 늘 홀로 존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요. 어쨌든 가을이 지나 추운 겨울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또 한 살 만큼의 무게를 더 지고 살아야 하네요. 삶에 대한 책임감, 무언가를 이루어야 할 것 같은 마음, 그리고 아직 내리지 못한 모든 것의 정의 같은 게 그것이겠죠.


이런 단상은 조금 오버인가요? 그저 인간이 임의로 정해둔 시간일 뿐인데, 마치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 때 시간도 함께 창조한 것처럼 믿는 꼴이 우습게 느껴졌거든요. 우리 인간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믿고, 시간에 쫓겨 스스로 불행을 사기도 하죠. 이럴 때면 인간은 정말 작고 어리석은 존재인 것 같아요 선생님. 물론 선생님과 저도 한낱 인간일 뿐이지만요. 적다 보니 조금은 지나친 감상인 것 같네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만 말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오만한 사람인 것 같아요.


허다하게 놓아버리고 싶은 삶인데 지겹다면서도 정말 놓지 않았던 건 선생님이 말해주신 말 한마디 때문이라는 거 아시나요. 저는 말 끝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사람이라 진심인 척하는 공언들도 믿을 수밖에 없어요. 모두 꾸며낸 말일지 몰라도 가끔은 그게 살아갈 용기를 주니까요. 선생님이 제게 해준 말들이 껍질뿐 일지라도 저는 그 말들을 믿었어요. 문장을 구성하는 낱말을 하나하나 쪼개어 아끼는 상자에 넣어두고, 이따금 꺼내보면 정말 조금은 괜찮아지는 것 같았거든요. 스스로를 마구 찔러대는 마음속 칼날이 조금 무뎌지는 느낌도 들고요.


아 참, 선생님은 말이 일회성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누군가 며칠 전에 이런 질문을 했거든요. 그 사람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아요. 말은 내뱉는 순간 휘발되고 마니까요. 하지만 누군가의 기억에서 영원히 기억된다면, 그렇다면 어떨까요. 저는 불행하게도 기억력이 좋아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제게 했던 말을 전부 기억해요. 참 재앙 같은 일이죠. 그래서 저는 사람을 쉽게 미워하고, 사랑하고, 마음들을 쌓아두었다가 한순간 전부 유기해 버리곤 해요. 아직도 이렇게 안 좋은 습관을 버리지 못했답니다. 왜 선생님에게는 자꾸 이런 말들을 하게 될까요?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더 이상 하다가는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될 것 같아 이 주제에 대해서도 말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곳에 머무르고 있어요. 환경이 바뀌지 않으니 저라는 사람도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마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하고 있어요. 선생님, 선생님도 잘 지내고 계신가요? 내일도 오늘 같은 비가 내리고, 비가 그친 이후면 바람이 더 차가워질 것 같아요. 미리 긴 옷을 꺼내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안부 전하겠습니다.
그때까지 평안하세요.

작가의 이전글 시대의 소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