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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Jun 03. 2023

벗은 몸을 좋아하십니까?

그 누구도 누구에 대해 완벽히 공감할 수 없다.

미용사가 목덜미에 바리깡을 가져다 댔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머리카락 절반이 잘려나갔다. 2015년 여름에 나는 투블럭 숏컷을 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잘려나간 머리카락 대신 얼굴에 마스카라며 아이섀도를 치덕치덕 칠하고 다녔다. 25세가 된 어느 날, 나는 화장과 브래지어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순간에. 치마를 멀리했고, 품이 넓은 티셔츠를 주로 입고 다녔다. 머리는 자라는대로 내버려두었다.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수험생 할인을 받아 비싼 헤어숍에서 머리를 염색하고 매직펌을 했다. 짧은 스커트에 힐을 신고 캠퍼스를 누비고 싶었다. 집에서 두세 시간씩 들여 네일 아트를 직접 했다. 남자의 시선을 받고 싶었고, 헌팅도 당해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픽업 아티스트라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길거리에서 “스타일이 좋으시네요”라며 접근하는 사람들. 내가 짧은 치마를 입을 때마다 사람들은 위아래로 훑어보고 지나갔다. 고등학생 때는 지하철 역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내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서서히 사라진 적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여성스러운 몸’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숏컷을 해도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점점 더 ‘미소년’이라는 단어에 만족을 느꼈다.


머리만 자르면 나는 섹슈얼하지 않은 여성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남자들은 끊임없이 내게 구애했다. 물론 싫진 않았다. 많은 사람들과 섹스를 하면서 그 사람의 시선을 통해 내 몸을 바라보았다. 욕조에 나란히 앉아 “가슴이 예쁘네”라고 하면 내 가슴이 예쁘구나 했다. 침대 위에 나란히 엎드려 “엉덩이가 예쁘다”라고 말하면 그런 줄 알았다. 페미니즘 수업 시간에 교수님은 “헤테로섹슈얼 메일 게이즈(heterosexual male gaze)에 대해 알려주셨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시각을 빌려 자신을 섹시하게 바라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정말이지 오랫동안 남자들의 시선 속에 젖어 있었다. 내 몸을 보며 섹시하다고 느낄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상상 속의 남성과 함께였다.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을 때, 희고 마른 어떤 남자를 보고 움찔하는 나를 봤다. 나는 여전히 남자 앞에서 긴장한다. 내 초췌한 모습을 들킬까 봐. 나는 정작 관심이 가지 않는 남자들이 나에게 관심을 주었으면 한다. 또 다른 날은 카페에 가서 일을 하다가 문득 창 밖을 봤는데 자전거를 탄 남성이 지나갔다. 조거팬츠를 흰 양말에 넣어 신고,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는 그 발목이 아주 멋졌다. 순간 나는 그것을 선망하고 있었다. 화장도 않고, 브라도 않는 나는 한동안 여성의 몸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긋지긋했다.


매거진 에디터 시절, 이맘때면 늘 ‘몸’에 관한 특집 인터뷰 시리즈를 진행했다. 매년 다양한 몸을 가진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번에는 정말 나올 이야기가 없지 않나?’ 싶었지만 매년 새로웠다. 매년 영감을 얻었다. 자신의 암 치병일기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쓴 조한진희 씨는 장애와 질병의 경계에 대해 반문하면서 그랬다. 모두 평생 함께 갖고 살아가는 거라고. 내가 나를 치유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곧 나고 내가 곧 몸이라고. 같은 해에 만난 내추럴사이즈 모델 ‘치도’ 씨는 ‘먹토’를 일삼다가 그만두게 된 일화로 유명해진 인플루언서다. 그는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거울을 보는데 자신의 몸이 아주 조화로워보였다고. 작년 여름에 만난 트랜스젠더 정글 씨는 누드 화보를 촬영하고 나서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면서 매일매일 거울을 보다 보니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됐다”고. “오늘 내가 카메라에 설 수 있는 건 내 몸이 아름다워서도, 내 몸을 사랑해서도 아니다”라고. 몸은 그냥 나다. 그걸 인정하고 나면 정글 씨의 말대로 “한결 수월해진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몸에 대해 얘기해도, 아직은 내 몸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건 불가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대상화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몸에 대한 시선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그 어떤 몸도 징그럽거나, 섹시하거나, 너무 뚱뚱하거나, 너무 마르지 않다. 그러면서 그 어떤 몸도 때로 징그럽고, 섹시하고, 뚱뚱해보이고, 말라 보인다.


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중년을 훌쩍 넘긴 여성이 젊은 남성 창부를 고용해 충만한 섹스를 깨달아가는 내용이다. 반전은 마지막이다. 여성이 처음으로 오르가슴에 도달한 건, 자위를 통해서였다. 발가락을 한껏 오므리고,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 자신의 성기를 만지던 여자는 일어나 거울을 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여자는 자기 몸이 섹시하다고 생각했을까? 자기 몸이 사랑스러웠을까? 나는 자기를 바라보는 자기의 시선을 획득한 것이었다고 본다.


나는 가끔 나체로 집에서 혼자 춤을 춘다. 내 몸에 취해서, 나에 취해서. 남의 시선을 벗어나고 나니 나만 남았다. 요즘은 머리도 다시 기르고, 슬릿이 깊게 파인 원피스도 마음껏 입는다.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 아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여성성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숏컷 시절을 지나, 여성으로서 아름다워보이고 싶다는 욕망을 순순히 인정하게 됐다. 여성스러워보이고 싶어도 괜찮다. 섹시해보이고 싶어도 괜찮다. 팬티가 보일락말락한 치마를 입어도, 몸을 숙이면 젖꼭지가 보일 정도로 깊게 파인 옷을 입어도 죄책감 없다. 남들의 시선은 내 몫이 아니니까.



글 @morhtnalic

그림 @robynne.illu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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