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상동나무

곶자왈의 삼동

by 오설자


학교로 가는 길 너머에는 화순곶자왈이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화순 곶자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독특한 숲으로 제주 자연의 허파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이다. 그 곶자왈에 삼동낭(상동나무)이 많았다.


상동나무는 갈매나무과 관목으로 높이 2m 정도로 때로는 덩굴성 형태로 자란다. 꽃은 늦가을에 피었다가 이듬해 봄이 되면 검은색으로 익는다. 봄에 꽃피고 가을에 열매 맺는 식물이 대부분이지만 삼동은 독특하게 이른 봄에 초록 열매가 달렸다가 점점 붉어지고 4,5월쯤 되면 탐스럽게 익어 까맣게 반짝인다. 삼동이 탁월한 항산화 음식이라고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따간다고 한다는데. 곶자왈의 식물들이 더 이상 헤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삼동은 달콤한 맛으로 우리를 유혹했다. 때는 바야흐로 삼동이 익어가는 계절. 평소에는 버스를 타지만 이때는 걸어서 온다. 친구들과 교복을 입은 채로 곶자왈로 뛰어 들어갔다. 흰 플랫칼라가 얼룩이 질까 봐 교복 깃을 목 안으로 깊이 집어넣고 전사들처럼 본격적으로 삼동 사냥에 들어갔다. 멀리 산방산이 우뚝 서 있고 고요한 곶자왈에는 참새들이 날아다녔다.


발밑에 울퉁불퉁한 자왈에 걸려 무릎이 까지거나 가시덤불 위로 넘어져 여기저기 긁히기도 했다. 알알이 검게 빛나는 삼동을 앞에 둔 우리는 그런 예고 없는 사고에 신경 쓰지 않았다. 우거진 덤불 사이에 삼동낭 가지를 들어 올리면 삼동이 주렁주렁 햇살에 반짝였다. 가지를 뒤집은 채 정신없이 따먹다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검게 변한 손톱과 입술을 마주 보며 잉크빛 이를 드러내고 웃곤 했다. 실컷 따 먹고 빈 도시락에 담아 집으로 가져갔다.


까맣게 익은 삼동열매 ⓒ김차선


봄은 짧았고 우리는 그 짧은 봄을 최대한 즐겼다. 삼동이 익는 동안 달콤함은 입속에 남았지만 그것은 내게 쓰디쓴 맛을 가져왔다. 친구들과 매일 삼동을 따먹고 놀러 다니느라 공부는 뒷전이었으니 기말고사 성적이 형편없었고 2학기 장학생에 그만 탈락하고 말았다. 인자하던 아버지도 그 일에는 많이 야단을 치셨다. 이후 나는 등하굣길을 아버지께 보고해야 했다.


달콤한 시절은 길지 않았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조금은 깨달았던 것 같다. 삶이 우리에게 쓴 잔을 내미는 것은 진정한 달콤함을 알게 하려는 것일지도.


기나긴 세월이 흘러도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을 문득문득 거니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다. 제주인에게는 뼈아픈 슬픔이 무한 재생되는 4월 어느 봄날, 그 시절 어디선가는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기근과 가난으로 혹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과 갈등이 가득했건만 우리에게는 달콤한 봄이고 참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아름다움이란 평온한 일상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상의 한 장면을 옮겨 그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이나 <우유를 따르는 하녀> 같은 그림들은 명작으로 칭송받으며 미학적인 감동을 제공한다. 돌담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수선화나 곶자왈에서 삼동 따먹는 그 풍경이 페르메이르가 그린 그림만큼이나 아름답게 여겨진다.


가까이 있어도 가치를 모르고 쫓기듯 서울로 오기 바빴던 나는 이제야 곶자왈을 걷는다. 그때마다 곶자왈 어딘가에 삼동을 따먹으며 웃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떨어져 있을 것만 같아 기웃거리게 된다. 얼마나 숲은 풍성해졌는지, 새소리는 얼마나 수다스러워졌는지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지만 변하는 것은 우리뿐이다.


날은 더 화창해지고, 봄기운이 온 산하에 퍼지며 초록이 물결 진다. 바야흐로 삼동이 익어가는 계절이다.




(<제주> 소식지 2023년 봄호에 발표한

<주머니에 봄을 담고>에서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keyword
이전 04화보리수 열매에 매달린 슬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