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사리

고사리 장마가 지면

by 오설자

버드나무에 새순이 돋아 늘어진 가지는 연둣빛 안개를 품고 있다. 언제 세상 밖으로 나갈까 기웃거리는 개나리 꽃댕강도 하얀 종꽃을 피웠다.


햇살이 가득 비치는 곳에 봄까치꽃이 수북하다. 꽃말처럼 기쁜 소식이라도 전할 것만 같다. 비단을 풀어놓은 길 같다고 하여 ‘땅의 비단’이라고도 부른다는데 그 귀여운 꽃이 큰개불알꽃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그게 안쓰러워 이해인 시인이 봄까치꽃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러준 꽃. 자연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땅이 부드러워지면서 새순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온다. 양지꽃이 노랗게 피어 눈을 즐겁게 하는 동안 땅속에서는 고사리가 고개를 내밀 준비를 한다. 멀리 봄 안개가 낀 들판에는 겨울을 견뎌낸 땅 속 고사리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촉촉한 비에 젖은 고사리가 동그란 머리를 내밀고 여기저기 돋아난다.


3월 중순에서 4월쯤 중순이 되면 봄바람에 묻어 마치 장마처럼 비가 오고 안개 끼는 날이 많다. 그 시기를 제주에서는 ‘고사리 장마가 진다’고 한다. 안개와 비를 동반하여 불청객처럼 오는 고사리 장마는 홀로 오지 않는다. 바쁜 봄 농사일이 지난 때라 술을 먹고 부부싸움을 하거나 농약 먹고 사달이 나기도 한다.


허리에 대바구니나 보자기를 묶고 아침 이슬이 매달린 풀 사이로 고사리를 꺾는다. 막 올라온 고사리는 털이 보송보송 난 머리를 아기손처럼 오그리고 있다. 잎사귀가 펼쳐진 것은 이미 세기 시작한 것. 어떤 곳에 자라야 사람 손을 피할지 잘 아는 것일까. 돌담 아래나 가시덤불 속 그늘이 진 곳에 살찐 고사리가 자란다. 겨울잠에서 깬 뱀이 슬슬 기어 다녀서 장화를 신어야 한다. 어릴 땐 장갑도 없이 고사리를 꺾다 보면 손톱이 온통 고사리물로 푸르죽죽 물든다.


꺾은 고사리를 가마솥에 살짝 삶아 멍석을 펴고 널어 말린다. 섬유질이 많고 영양소가 풍부한 고사리는 주로 말려 먹는다. 예로부터 제사음식에 꼭 필요한 음식이라 말려 두었다가 쓴다. 마른 고사리는 물에 불렸다가 고사리탕쉬(나물)로 만든다.


나는 생고사리를 더 좋아한다. 통통한 고사리를 씹을 때 부드러운 질감이 입안에 남는다. 시댁에서 제사 음식을 만들 때는 살짝 데쳐 얼린 생고사리를 쓴다. 사촌 형님만 아는 숨겨둔 ‘고사리밭’에서 살찐 고사리를 골라 꺾어 주신 것을 냉동했다가 고사리탕쉬(나물)을 만든다.


생고사리를 볶을 때는 자꾸 뒤적거리면 안 된다. 여린 고사리가 다 물러 뭉개지기에 윤기 나는 몸체를 온전히 보전하려면 간장과 참기름을 넣은 양념이 졸아들 때까지 진득하니 기다려야 한다. 뭐든 그렇다. 기다림이 부족하면 그르치기 십상이다.


이번 봄에는 고사리를 꺾으러 제주살이 하는 친구 집에 모였다. 비가 오락가락. 이 빗속에 고사리들이 고개를 내밀겠지. 어둠이 내리는 성산에서 만나 저녁을 먹으러 간다. 성게국과 갈치, 구운 고등어, 옥돔... 이런 반찬을 먹을 때 제주에 온 것이 실감 난다.

장화, 앞치마, 배낭, 장갑, 덧소매 같은 고사리 도구를 거실에 늘어놓고 고른다. 이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한 친구가 고맙다. 도구는 훌륭하나 얼마나 꺾으려는지.


날이 밝아오기도 전에 나선다. 안개비가 내리고 꽃비도 내린다. 자왈 위에 아기 손을 오그린 듯 올라온 고사리를 보자 산삼이라도 본 듯 기쁘다. 누군가 이미 훑고 지나서 꺾은 고사리 줄기에 동그란 물기가 남아 있다. 멀리 고사리가 보여 꺾으면 그제야 내 앞에 우뚝우뚝 나 있는 고사리가 보인다. 가까운 것은 귀한 줄 모르고 먼 것만 커 보인다.


이 아꼬운 고사리! 덤불 안에 고사리 몇 개가 있을까요.


“똑, 똑, 똑,”

꺾는 소리가 경쾌하다. 고사리도 꺾이지 않으려 구석진 곳이나 가시덤불 아래에 나 잡아봐라 하고 숨어 있다. 손을 뻗어 꺾느라 가시에 긁히고 찔리고. 하나씩 꺾는데도 손 안 가득 불어나는 재미. 비에 옷이 다 젖어도 우리는 시간을 모르고 고사리를 찾아 헤맨다. 두 시간 넘게 꺾고 내려오는데 길가에도 고사리가 있을 것만 같아 자꾸 기웃거린다.


다음 날은 더 일찍 갔는데도 이미 차가 몇 대나 세워져 있다. 육지에서 많이들 내려와 열흘 만에 얼마를 벌었네 하는 소문이 돈다. 한 아저씨가 고사리 수확을 자랑한다. 육지서 온 분이다. 비닐 가방에 잔뜩 꺾은 살찐 고사리! 많이도 꺾었다. 그런데 너무 깊이 꺾었다. 저리 꺾으면 질길 텐데... 무게를 많이 나가게 하려는 건 아닐까.


새벽에 나가보지만 이미 누군가 한 차례 훑고 지나갔으니 우리 눈에 들어올 턱이 없다. 고사리는 가시덤불 아래나 조금씩 보인다. 사람들 손에 타지 않으려고 더 깊이 숨어버린 고사리. 장화를 신은 발로 헤치면서 숨어 있는 고사리 길게 꺾어 '오잘고'라고 부른다. ‘오늘의 잘 꺾은 고사리 칼’이라고 휘두른다. 앞치마에 모은 것을 담을 때 뿌듯하지만 허리가 무지 아프다. 그리 아파도 또 굽어 꺾는다.


우뭇개 1번지 미숙씨네 식당에서 성게죽, 보말죽과 해물 떡볶이, 고사리 해장국을 먹는다. 고사리를 계란에 찍어 먹으니 독특한 맛이 난다. 이 집 음식 참 맛나다. 나는 특히 좁쌀과 찹쌀을 넣어 씹는 맛이 조랑조랑한 죽맛이 일품이다. ‘우뭇개 1번지’는 식당 주소다. 식당주인 미숙 씨는 우리 친구의 친구다. 식당이 바쁠 때는 친구가 가서 설거지도 도와준다.


삼일 동안 고사리 여행. 내년에도 이어진다.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 모든 준비를 하고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맛집에도 가고 온갖 거 챙기며 잠재워준 친구가 고맙기만 하다.


비행기 타고 온 고사리를 삶아 물에 담갔다가 소분하여 냉동하고 볶아먹거나 장아찌를 만든다. 내가 꺾은 오동통 어린 고사리. 힘들게 꺾은 귀중한 것들이라 맛이야 더할 나위 없다.


자연은 이렇듯 우리에게 온갖 것을 제공하고, 우리는 그것을 취하며 당연히 사용하곤 한다. 때가 되면 새싹으로 돋아나 우리의 눈과 입,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을 그저 당연하게 여긴다.

자연은 그렇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다.


이걸 삶아 반은 장아찌로 만들었다. 벌써 다 먹고...내년을 기다려야지.




keyword
이전 05화상동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