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레에 매달린 아픈 사연
농촌의 겨울맞이는 분주하다.
겨우내 소들의 먹이가 될 촐(새솔)을 베고 묶어 낟가리를 쌓아 놓고 겨울 준비 막바지에 들어간다. 월동준비로 연탄을 들이고 보일러 기름을 보충하듯, 겨울 동안 구들을 따듯이 데워줄 쇠똥을 주워야 한다. 들판에 널려 있는 소나 말의 배설물은 비에 젖어 여러 차례 젖어 마르면서 냄새가 빠지고 빳빳하게 말라 풀밭에 들러붙어 있다. 그것을 주워 비료부대에 가득 담아 달구지에 싣고 온다. 주변에 불 땔 것들이 지천에 널려 있지만 마른 쇠똥이 연료로는 제격이다. 천천히 오래 타서 밤새도록 방을 뜨끈하게 데워주기 때문이다.
인도의 시골길을 지날 때 우리와 비슷한 풍경을 본 적이 있다. 시골길에 늘어선 집 벽에 쇠똥을 도배지처럼 붙여 놓았다. 비 맞고 바람에 냄새가 빠지고 바삭하게 마를 터였다. 그들도 그렇게 말려 연료로 쓰고 있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든 비슷하다.
아버지가 쇠똥을 줍는 동안 어린 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것에 눈이 팔린다. 볼레(보리수)가 붉게 익어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분홍색 볼레가 구슬아이스크림 같이 주렁주렁 익어 나를 부른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진다. 이른 눈을 맞고 나면 색이 더 붉어지고 투명해져 달콤한 맛도 더해진다.
국민학교 5학년 어느 날, 교실 청소하던 우리는 책가방을 교단 아래 숨기고 산방산으로 볼레 따먹으러 간다. 먼 길을 걸어가 산속에서 볼레를 따먹고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날은 어두워지고 부모님들은 우리를 찾으러 학교에 왔고, 우리는 교실에 숨겨 둔 책가방을 들고 담 아래 숨어 있다가 학교 담을 넘어 집으로 내달린다.
들판의 새콤한 간식으로만 알던 볼레에는 한 많은 사연이 있다.
4.3이 터지자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해안가 마을로 강제 이주를 해야 했다. 송요찬 연대장의 초토화 작전으로 내려진 소개령 때문이었다. 미처 내려오지 못한 사람들은 산속에 숨어 있었다. 긴 도피 생활에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배고픔을 달래려 볼레를 따먹으며 목숨을 연명하였다. 볼레씨까지 먹고 피똥을 싸며 목숨을 부지했지만 살아남은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볼레에는 그런 역사의 비극이 들어 있다.
다랑쉬오름은 그 비극의 현장 중에 하나다. 도랑쉬(달항아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높이 솟은 다랑쉬오름으로 간다. 하늘은 얼마나 맑은지 구름이 솜처럼 풀리고 억새는 땅에 구름처럼 피어 있다. 경운기 바퀴가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다랑쉬 굴이 나온다.
분화구처럼 우묵한 평지처럼 보이지만 좌골 모양의 굴 안은 높이가 1미터 37센티가 넘는 곳도 있다. 4.3 때 토벌대가 올라와 총을 쏘고 협박해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가장 독하고 맵다는 촐(새솔)과 모멀짚(메밀짚- 연기가 매우 독하다.)으로 연기를 피워 굴 입구를 막고 질식사하게 했다. 그렇게 생죽음을 당한 하도리와 종달리 주민 열한 명이 백골이 된 채 44년 동안 굴속에 갇혀 있다가 1992년 유해와 함께 니켈이빨, 안경, 가죽신 같은 것들과 된장 항아리와 솥과 요강이 발견되었다. 그들도 볼레를 따 먹으며 배고픔을 이겼을 텐데….
토벌대는 누군가가 밀고한 그곳을 찾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마다 샅샅이 뒤졌다. 총부리 앞에서 죽음 대신 바꾼 밀고. 밀고한 죄책감 때문에 자살도 많았다. 그들의 죽음도 죽음 앞에서 피하지 못한 밀고도 더할 수 없는 비극이다. 제주의 아픔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진다.
여기에 인간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우리는 죽은 자들,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우리는 캄캄한 굴 속 연기에 갇혀 연기로 떠도는 자들
사라지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다만 살기 위해 깊이 들었을 뿐
마지막 숨이 막힐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엄마는 한 줄기 숨을 아이에게 주었고
연기의 소리가 인간에게 닿기를 기다렸다
부디 우리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
우리의 그날이 당신들의 존엄이기를
희망이기를, 평화이기를 바란다
당신의 그 자리, 서럽도록 아름다운 다랑쉬의 명예를
지켜주길 바란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는 파도가 되었다
당신들은 우리가 그토록 찾던 봄이다
그대, 그러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말기를
이것이 우리들의 전언이다
- 제주 4.3 연구소 제주민예총 삼가 세우다
돌탑에는 그들의 넋을 알기라도 하듯 칡이 얽어져 기어간다. 시비가 세워진 돌 위에 놓인 고무신 한 켤레가 외로이 넋을 지킨다.
다랑쉬오름 봉우리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끈다랑쉬오름이 나지막이 엎드려 있다. 가운데 오목한 분화구 둘레로 억새가 흔들리고. 멀리 콩이 익어가는 노란 밭, 메밀꽃이 핀 흰 밭, 그 둘레를 둥그렇게 둘러싼 밭담이 어우러진 풍경이 그림처럼 평화롭다. 어디에도 슬픔의 단초를 찾을 수 없다. 비극이 있었던 역사를 묻은 곳에 선 나는 마음이 무거운데 하늘은 너무도 맑다. 세상이 눈부시다.
볼레는 우리가 들판에서 따먹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야생 열매였다.
곧 겨울이 오고 싸락눈 휘날리는 날이 오면 우리 무대는 마당으로 바뀐다. 비료포대로 올레에서 미끄럼을 타고, 어쩌다 함박눈이 쌓이면 눈사람을 만들어 몇 개씩 세우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언 손을 녹일 것이다. 쇠똥으로 불을 땐 방구들은 쩔쩔 끓고 이불속에서 한 다리 두 다리 놀이를 하다가 엄마가 쪄 준 삶은 빼때기를 먹으며 겨울을 날 것이다.
드디어 우리도 겨울잠을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