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의 몰마농꽃
올레 담 밑에는 여러 가지 꽃이 피어났다.
분꽃, 봉숭아, 마농꽃, 채송화…... 그중에 제일 먼저 피는 꽃이 수선화다.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이른 봄 제주 들판에 피어 찬바람에 몸을 떠는 가련한 꽃. 잔설이 남은 돌담 아래 핀 수선화가 정이월 매운바람에 흔들리면 신화의 이야기처럼 처연하기까지 하다.
올레에 피는 꽃들 중에 수선화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꽃이다. 노란 잔을 얹은 금잔옥대보다 속꽃잎이 겹쳐진 제주수선화를 더 좋아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다 마른풀 사이에 돋아난 수선화를 꺾어와 책상 위에 올려놓고 킁킁거리면 언제나 나른해지는 향긋한 냄새.
수선화는 지중해가 원산지인 다년생 식물로 가을에 자라기 시작하며 12월에서 3월 사이에 꽃이 핀다. 꽃과 뿌리는 약용으로 쓴다. 물에 사는 신선이라는 의미의 수선水仙에서 알 수 있듯 천선天仙 지선地仙 다음이라고 여겨질 만큼 수선은 고고한 품위를 자랑하는 꽃이다. 제주에서는 몰마농이라고 부른다. ‘말이 먹는 마늘’이라는 의미다. 제주에 흔전 만전한 수선화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그 이름 속에 숨어 있다.
어떤 꽃에는 누군가의 삶이 담겨 있다.
제주 수선화에는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가 얹혀 있다.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간 추사는 처음으로 수선화를 만난다. 그 꽃의 청순함에 반하여 평생 곁에 두고 완상 하면서 애지중지한다. 연경에서 가져온 수선을 다산에게 보내며 아름다움을 나누기도 한다. 추사가 “백 번 꺾여 온 이곳” 제주도로 유배되어 가시나무 울타리 안에서 위리안치살이를 할 때 추사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던 꽃이다.
푸른 바다 푸른 하늘 한결같이 웃는 얼굴
신선의 맑은 풍모 마침내 아끼지 않았어라.
호미 끝에 버려진 심상한 이 물건을
밝은 창 정갈한 책상 그 사이에 공양하네.
*추사의 한시 <水仙花>
이렇듯 시와 그림으로 수선을 노래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머나먼 섬에 귀양 와 있는 자신의 모습을 고고한 수선화에 투영하였는지도 모른다. “흰구름이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장대하게 쌓여 있는 듯 하다네. 그 기품 있는 꽃을 귀한 줄 모르고 소와 말에게 먹이고 짓밟아 버린다네.” 안타까워하며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그런 이유로 ‘말의 마늘’이라는 뜻의 몰마농이란 이름을 얻었으려나.
너무 흔하면 그런 일이 생긴다. 아프리카 오지에 갔더니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공깃돌이 모두 보석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밭두둑 어디에나 구근으로 자라는 몰마농은 농사를 짓는 제주 사람들에게는 검질(잡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흔한 꽃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다녀오는 이들에게 부탁을 하여 가져올 정도로 귀한 꽃이었다.
수선화를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수선화에 마음을 놓고 완상하고 있는 추사의 기품 있는 정경이 그려지곤 한다. 제주에는 수선화를 노래한 시인이 또 있다.
흰 눈 날리는
추운 겨울날
겨울에 피는 꽃은 아름다워라
가슴이 노랗게 달아올라서
외로운 들판 위에 눈이 내려도
진실로 커다란 겸손으로
마음을 밝히시는
*나기철 <수선화> 부분
그의 시를 읽으면 마음에 두고 멀리서 바라보는 애련이 느껴진다. 이렇듯 수선화는 고고한 선비의 사랑을 받기도 하고 시인의 애절한 마음을 부르게도 하였다.
설 즈음에 고향에 가면 들길에 수선화가 피어 바람에 흔들린다. 한 줌 꺾어서 코에 대고 길을 걷는다. 집에 와 꽂아두면 봉우리였던 수선이 어느새 화사하게 피어나면서 집안 가득 그윽한 향기를 퍼뜨려 놓는다.
오래전에 우리 몫으로 받은 모기 눈물만한 밭이 하나 있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수십 년 농사를 짓던 밭은 돌보지 않아 이제는 곶자왈처럼 덤불이 가득한 골충이 되어 어디가 우리 땅인지 경계도 알지 못한다. 거기에 얽어진 칡과 가시덤불을 베어 내고 수선화를 심으면 어떨까 꿈꾸곤 한다. 올레길 오가는 사람들이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다가 숲에 가려진 수선화 꽃밭을 뜻밖의 선물처럼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수선화 꽃밭. 윌리엄 워즈워드가 28만 킬로미터를 걸어 헤매다 어느 언덕에서 만난 춤추는 수선화처럼 꿈 같은 풍경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