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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풀들

그들이 불러주는 이야기

by 오설자


들에는 온갖 풀이 자란다. 쓸모없는 풀이어도 햇빛에너지를 통해 유기물을 생산하고 다시 흙으로 돌려주어 기름진 땅을 만들어준다. 뿌리를 깊게 뻗어 미네랄 같은 미량 요소를 끌어올려 작물에 나누어주는 역할을 한다.


음식으로 먹거나, 잎을 뜯어 빻아 상처가 난 곳에 처매 주는 약풀이 되기도 하고, 뱅뱅 감아 장독 위에 올려놓은 가시 돋은 삼수세기(환상덩굴) 줄기는 파리나 벌레를 막아 준다. 솔잎을 긁으러 갔다가 온몸에 가마귀바농(도깨비바늘)이 붙어 있는 것을 떼내느라 힘들었지만, 그 풀에서 벨크로의 원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고는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밭에서 보리 검질을 매다가 작박에서 점심을 먹을 때는 돌담에 뻗어 자라난 여린 풀줄기를 똑똑 잘라 그것으로 쌈을 싸 먹었다. 이름도 모를 풀은 쌉싸름한 맛으로 입맛을 돋우며 빈약한 농촌의 밥그릇을 싱싱하게 해 주었다.


이런 좋은 풀도 있지만 어떤 풀은 그저 천덕꾸러기 잡초도 있다. 제주에서는 이런 잡초를 검질이라고 부른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번성하는 검질은 농사짓는 부모님에게는 애물단지 같았다.


여뀌, 절란지(바랭이풀), 방동사니가 얼크러진 모습


고향의 들판은 먹을 것들이 널려 있었다. 가게에서 주전부리를 사 먹지 못하는 가난한 시절의 아이는 들에서 자라난 것들을 따먹느라 들판으로 쏘다녔다. 봄이 되면 열리는 삼동(상동열매)을 따 먹느라 입술은 잉크를 먹은 것처럼 까맣게 변하고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길에 널린 찔레순을 꺾어 먹기도 했다. 가시에 찔리면서도 통통하게 물이 오른 연붉은 찔레순을 꺾어 껍질을 벗기고 씹으면 아삭아삭 달큼한 맛이 났다. 그 꽃은 또 얼마나 향기로운지. 봄이 오면 삥이(삘기)가 돋아나고 촉촉하니 달큼한 삥이는 들판의 또 다른 간식이 되었다.


보리가 익어갈 때쯤이면 보리탈(딸기)이 익었다. 여름 햇살에 빨갛게 익은 보리탈을 따먹으며 내 얼굴도 익어갔다. 목화 꽃이 피기 전 목화다래는 껍질 속의 폭신한 하얀 과육이 귤같이 갈라져 달콤했다. 감자밭에는 눈처럼 감자꽃이 피었다. 막 매달리기 시작한 고구마를 쓱 옷에 문지르고 껍질을 벗겨서 먹기도 했다. 가을 길에 피어난 운동고장(인동꽃)을 따서 달콤한 꿀을 혀끝에 넣었다. 늦가을 저녁엔 촐(솔새)을 베러 갔던 아버지 손에는 까만 멀리(머루)가 주렁주렁 달린 줄기가 들려 있었다. 졸갱이(으름)도 있었다. 바나나보다 작은 것이 쪼개면 하얀 마시멜로처럼 까만 씨와 말랑한 과육이 어찌나 달콤했는지. 어둠이 내리는 올레에서 나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이 정말로 행복했다. 어린 시절 그렇게 산과 들에서 나는 풀과 열매를 먹고 자라서 그럴까. 우리는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무럭무럭 자랐다.


보리탈(멍석딸기) ⓒ김차선

태풍이 불 때마다 풋감이 떨어졌다. 엄마는 풋감으로 물들여 갈옷을 만들었고 그 옷으로 여름 내내 농사일을 했다. 그늘이 짙은 유지낭(당유자나무), 명절이 다가오면 추렴하는 돼지를 매달아야만 하는 아픈 추억을 가진 사대기낭(생달나무), 태풍에 부러져 둥치만 남은 채 굵은 뿌리가 담 속에 박혀 마당을 지키는 숙대낭(삼나무), 초록비를 선사하던 대낭(대나무)... 모두 정겨운 나의 친구들이었다.


나의 삶에 끼어든 푸나무들.

일련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과 삶을 성찰해 본다.

사람들의 삶 속에는 풀과 나무가 엮어져 있고 풀과 꽃과 나무에는 삶의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든 녹아 있다.그것들을 모아보고 싶었다. 고향에서 부르는 이름과 책에서 배우는 이름이 다른 것이 신기했다. 삼마는 반하이고 물릇(무릇), 눈벨레기(담쟁이), 푹게(까마중), 대우리(귀리), 꿩마농(산달래), 졸겡이(으름), 운동고장(인동꽃), 세우리꽃(부추꽃), 부루꽃(상추꽃), 돔박낭(동백나무), 자ᆞ밤낭(구실잣밤나무), 굴묵이낭(느티나무…. 이렇게나 재미난 이름들로 부른다. 정겹고도 독특한 제주의 풀과 꽃, 나무들의 이름을 이야기 속에 남기고 싶었다.

그렇더라도 원예도감이나 식물 사전과는 거리가 멀다. 풀, 꽃, 나무와 함께 한 고향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이며 주변에서 보고 자란 식물들에 얽힌 소박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다. 제주의 풀과 꽃, 나무들의 이야기이면서 부모님 삶의 이야기이고, 그 시절을 살았던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풀은 다시 봄이면 새로 돋아나지만, 인생은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수피가 말라 벗겨지고 점점 늙어가는 고향 집 나무들을 보며, 제주에서만 불리는 다정한 이름들을 잊지 않도록 저장하고 싶었다.



한여름 아침, 산방산


여전히 고향을 지키는 풀꽃과 나무들. 그것들의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불러내는 나의 조그만 일이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풍경 그리운 순간을 돌려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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