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속에 숨은 약초
이전부터 늘 느껴온 것이지만, 제가 윗동네라고 부르는 서울이나 경기도 지방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면 뭔가 허전합니다. 친구들이 맛있는 집이라고 데려가 주거나, 방송에도 나왔던 유명한 집들도 가서 먹어보면, 먹을 만은 하지만 맛있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전주 음식에 익숙해진 제 입맛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장으로 맛을 내는 전라도 음식에 익숙하고 어려서부터 그것이 맛있다고 생각해온 저에게 윗동네 음식은 왠지 싱겁고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최순우 님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보면, 이전 우리네 식초병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그만 옹기병에 술을 담아, 솔잎으로 대충 입구를 막고 따뜻한 부뚜막에 두면 초가 되는데, 그 주위에는 늘 초파리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고 합니다. 초를 따라 마시고 술을 채워두면 다시 만들어지는데, 그 초맛이 집집마다 다 달랐다고 하지요. 흔히 음식 맛은 장맛이라고 하는데, 된장이나 고추장 그리고 간장의 맛도 이야기 속 식초처럼 맛이 모두 다르고, 그 다른 맛이 장으로 맛을 내는 우리 음식에서는 그 집안의 음식 맛을 결정짓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장맛의 비결이 바로 장을 담그는 사람의 손에 있는 여러 가지 균의 종류와 그 비율이라는 것입니다. 장을 담그면서 손으로 재료들을 만지는데 이 때 그 사람의 손에 살고 있는 잡균들이 묻어 들어가고 이러한 균들이 장의 발효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니, 집집마다 다른 장맛의 비밀은 바로 장 담그는 사람의 손에 있는 셈입니다. 음식 맛은 손맛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해마다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그것으로 간장, 된장, 고추장 만드는 일을 어머니가 직접하십니다. 누나들도 있지만 장 담그는 일이 시골집 넓은 마당이 아니면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어머니가 담그는 장이 맛있기 때문에 다같이 담궈 나눠 먹고 있습니다. 해마다 고추장을 담글 때면 찹쌀죽과 고춧가루를 나무주걱으로 섞는 일이 제가 맡은 일이었는데, 올해도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추는 남미가 원산지로, 조선 중기 이후에 남방으로부터 감자·고구마와 같이 전해졌습니다. 이렇게 들어온 고추는 우리 음식의 일대 혁명을 가져오는데, 고추장과 고추가 들어간 여러 양념으로 오늘날 한국 음식의 특징인 매운맛과 선명한 붉은 빛깔을 갖게 된 것이지요.
한국의 매운맛을 대표하는 고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추(辣椒 랄초)
성질이 뜨겁고 맛은 맵고 독이 없다. 배를 따뜻하게 하고 위의 기능을 도와주며, 몸에 들어온 한기를 몰아내고 습을 없앤다. 또한 땀을 내게 하는 작용이 있다.
고추는 성질이 맵고 뜨겁기 때문에 위장이 차가워서 생기는 증상이나, 우리 몸에 차가운 기운이 들어와서 생기는 증상에 쓸 수 있습니다. 또한 차고 습한 기운으로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저린 증상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현대 약리적으로는 고추에 들어있는 캅사이신이란 물질이 식욕을 증진시키고 위 운동을 활발하게 하며 일부 균에 대한 항균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이 먹으면 뜨거운 기운으로 인해 몸에 화(火)가 생겨 치질이나 치통이 생기고 목이 부을 수 있습니다. 또한 위염이나 장염, 설사와 구토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하니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특히 기침을 하거나 눈병이 있는 사람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좋아하긴 하지만, 몇 해 전부터 부쩍 매운 음식이 유행인 듯합니다. 보통 고추로는 그 맛을 낼 수가 없어서 청양고추를 넣는 것은 기본이고, 더 매운 고추를 넣거나 고추에서 매운 맛만을 추출해 넣기도 합니다.
매운 맛은 발산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몸의 막히고 답답한 것을 풀어주지만, 매운 음식이 유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쌓인 게 많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나라가 기울려면 풍속이 변하다고 했는데, 서민들 살기가 힘들어지니 사람들 입맛까지도 변하는 듯합니다.
무더운 여름, 차가운 물에 찬밥을 말아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시원한 토방 마루에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낮잠 자곤 했던 어린 시절이 그리운 요즘입니다. 그 시절 기억처럼 시원하고 평화로운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