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의 기차> 제르마노 쥘로. 알베르틴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나. 고모할머니댁에 가기 위해 언니와 단 둘이 탄 기차 안에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바깥을 풍경을 바라보다가 산의 뾰족함에 놀랐다. 토끼 모양, 양 모양, 다양한 구름 모양 찾기에 열중했다. 스쳐간 어느 옛날집 마당에 걸려있는 옷가지를 보고 저건 누구 옷일까 추측했다. 교복 입은 어떤 언니, 쌩 하고 지나가는 중국집 오토바이 배달원 아저씨를 보며 저들은 어디로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일까 상상했다. 정말 재미있었다. 개학하고 참여한 백일장에서 기차에서 바라본 풍경과 감정을 시에 담았더니 금상을 받았었다. 이 모든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신기하다.
어른이 된 나는 출장을 위해 탄 기차 안에서 참 많은 일을 했다. 컴퓨터로 자료를 검토하고 필요한 수정 작업을 했다. 점심식사를 건너뛰긴 아쉬워 기차역에서 단 3분 만에 구매한 햄버거세트를 먹었다. 그러고 나면 알람을 맞추고 잠을 잤고, 정확히 목적지역에 다다르기 5분 전에 깨어나 하차할 채비를 했다. 너무 피곤했다. 이 상황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 것이 신기하다.
제르마노 쥘로와 알베르틴의 그림책 <토요일의 기차>는 어린아이가 도시의 집을 떠나 시골 할머니 집으로 향하는 기차의 이야기다. 방학은 아니지만 주말을 할머니와 보내기 위해 토요일에 가는 것일 테다. 얼마나 먼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기차를 타는 것이 참 기특하다.
아이는 기차 안에서 수시로 바뀌는 바깥 풍경들을 바라보고 점점 상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엄마와 할머니가 세계를 다 가볼 수는 없다고 한 말에 대해 아이는 다 가 볼 수 있을 거라고. 급기야 다 가 볼 거라고 다짐한다. 그 또한 대견스럽다. 아이의 다짐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누가 옆에서 안 된다고 해도 될 거라고, 그렇게 할 방법을 찾을 거라고 당당할 수 있는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공지능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알 수 없는 미래사회에서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일, 힘든 일, 돈이 많이 드는 일은 로봇이 대체할 확률이 높다. 인간만이 가진 능력과 창조성이 발휘되려면 진짜로 본인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스스로 꾸준히 성장시킬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불안이 가득한 사람들은 AI로 대체되지 않을 직업은 무엇인지 물어보고 찾아 헤맨다. 나에게 초점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역시나 대세에, 누군가의 말에 이끌려가길 원하는 것이다.
아마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 현실에 눈뜨지 않고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 때, 그때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고 즐기는 알아챘을 것이 분명하다. 하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었다. 몇 십 년이 지나 지금 보니, 나는 여전히 그것을 좋아하고 있었고 결국 그곳으로 돌아왔다. 스티브 잡스가 졸업식 축사로 언급했던 '점들의 연결'이 이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따지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옳았다. 기차 안에서 마음껏 상상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생각했던 그것이 옳았다. 현실과 타협하고 타인의 바람대로 사느라, 남의 눈치나 보고 자기 스스로를 검열하고 제한하느라 진짜 내가 원했던 것을 한동안 잊고 살았을 뿐이다. 지금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껴진다면 열 살 무렵의 나로 되돌아가보는 건 어떨까? 열 살처럼 온전히 나로서 세상을 마주한 아이로서 기차를 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