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맞은 아카시아
"5월쯤 피었던 것 같은데?"
벚꽃도 지고, 진달래도 지고, 철쭉도 후드득 꽃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하니, 아이들이 아카시아꽃에 대해 물었다.
며칠 전 아이들 등하굣길에 드문 드문 하얀 몽글몽글이들이 보였다. 드디어 이 동네도 꽃이 피었다며 아이들과 소리를 질렀다. 성격 급한 아이들은 얼른 아카시아꽃 튀김을 해 먹어야 한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산책 한번 나갈라치면 1km 떨어진 편의점까지 가면 아이스크림을 사 주겠다, 컵라면을 사 주겠다 꼬셔야 갈까 말까였던 아이들이 단번에 집을 나섰다. 둘째는 킥보드를 타고, 첫째는 내 손을 잡고 아카시아꽃 채취에 나섰다.
차가 다니는 도로와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야 하고, 적어도 내 손을 뻗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했다. 아직 덜 핀 몽우리만 있는 것도 안 되고, 완전히 다 핀 것도 식감이 떨어지니 적당히 단단하게 피어 있는 꽃송이여야 했다. 아이들은 "저기 있다!" 하고 쫓아 가선 울타리가 쳐 있어서 실망하기도 하고, "저긴 어때?" 하고 달려 가선 생각보다 키가 큰 나무를 보고 좌절하기도 했다. 너무 안 피어서 혹은 누렇게 병이 든 듯해서 나무 몇 그루를 지나쳤다.
흔하지 않은 산책 기회에 나는 이때다 싶어, '조금만 더 가보자~'를 반복하며 드디어 아이들과 왕복 한 시간을 걷는 신기록을 세웠다. 산 좋고 물 좋고 공원도 많은 이곳에 살게 된 지 3년 차지만, 아이들이 이만큼 걸은 것이 아마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나 혼자 굉장히 흐뭇해하면서 산책길을 즐겼다. 결국 우리가 찾은 아카시아꽃 채취 명소는 지난해에 땄던 그 자리였다. 집에서 7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인데, 욕심내어 더 멀리 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아쉽게도 내년에는 '조금만 더 가 보자.'가 안 통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딱 오늘 저녁 튀김을 해 먹을 양만큼만 송이째 따서 종이가방에 넣어 들고 왔다. 그리고 꽃 속에 숨어있을 작은 벌레나 먼지를 씻겨내기 위해 식초 한 스푼 넣은 물에 5분 정도 담가놓았다. 꽃잎이 떨어지지 않도록 부드럽고 매너 있는 손길로 살짝살짝 누르기도 하고 흔들기도 했다. 그러자 매우 자연에 살 것 같은 거미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모르고 먹으면 단백질 섭취겠지만, 알고 보면 식초에 감사하게 된다.
식초 넣은 물에서 송이 끝을 잡고 하나씩 흔들어 대면서 꺼냈다. 그리고 깨끗한 물에 두 번 정도 조심스레 씻었다. 채반에 받쳐 물을 빼주는데 이때 한 송이 들고 향 한번 맡고 입 속으로 직행시켰다. 가장 순수한 아카시아꽃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지금이다. 어렸을 적 따 먹었던 그 맛보다는 어딘가 맹숭맹숭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끝맛이 유기농 사탕수수 줄기를 맛본 것 같은 느낌이다. 상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튀김가루에 물을 넣고 묽게 반죽한 다음, 한 송이 한 송이 담갔다가 기름으로 퐁당 떨어뜨린다. 반죽에 들어갔을 땐 비 맞은 생쥐꼴인데 기름에 들어가면 만개하는 벚꽃처럼 퍼진다. 이 모습을 본 아이들은 꽃잎이 펼쳐지는 것 같다며 박수를 쳤다. 기름의 온도가 너무 낮으면 바삭하지가 않고, 너무 높으면 금방 누렇게 익어 꽃의 색을 잃는다. 그 적당함을 찾기란 언제나 힘든 일이지만, 튀김 젓가락으로 들었을 때 모양이 구부러지지 않을 때 꺼내면 적당히 바삭하더라.
아카시아꽃 튀김 한 송이 끝을 잡고 입 안으로 넣는다. 그리고 앞니가 문지기가 되어 막아주고 줄기를 잡고 있던 손을 쭉 잡아 빼면 가느다란 줄기만 빠져나온다. '이렇게 먹는 거야~' 꽃 튀김 좀 먹어본 여자라는 뉘앙스로 아주 멋지게 시범을 보였다. 왠지 모르게 멋짐이 폭발했던 것 같다.
각기 떨어져 있던 꽃잎 튀김이 입 안에서 같이 뒹굴며 바스락 씹히는 식감이 일품이다. 그사이에 기름을 많이도 먹어 생각보다 진득한 느낌이 들지만, 씹는 끝에 느껴지는 수줍은 달달함이 참으로 반갑다. 튀김을 하는 김에 둘째가 요청한 고구마튀김도 하고 내가 먹고 싶어 가지튀김도 했지만, 역시나 오늘의 주인공은 아카시아꽃 튀김이다. 딱 5월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덜 피어도 안 되고 많이 피어도 안 되고, 비가 와서 떨어지기 전에 꼭 따야 하는 귀한 것을 먹었다. 중요한 미션을 또 하나 수행한 것 같다.
아카시아꽃 튀김을 먹고 나니, 아이의 질문이 바뀌었다.
"엄마, 산딸기 언제 따먹을 수 있지?"
산딸기를 떠올리는 걸 보니 이제 여름을 기다릴 때가 되었나보다. 우리나라의 봄이 이렇게나 길었던가. 봄인가 싶으면 여름이고, 가을인가 싶으면 겨울이라 간절기 옷을 사는 것이 그렇게 돈 아까웠다. 그런데 계절이 느껴지는 자연과 함께 사니 봄은 봄대로 자신의 색깔을 빠짐없이 내고 있었다. 봄을 대표하는 것이 벚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열심히 알려주고 있었다. 이 계절, 지금 이 시간, 여기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보고 느끼고 즐기다 보니 제대로 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