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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두두 Jun 19. 2023

동시를 썼는데 그냥 시 같대요

동시와 시의 차이

매주 가는 동네책방에서 동시 수업을 들었다. 원래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있었다거나 동시 공모전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매주 가는 책방 사장님이 기획한 프로그램이고, 무료이며, 책방을 같이 다니던 친구가 같이 하자고 했을 뿐이다. 고로 동시를 쓰겠다는 동기는 '크게 관심 없지만 시간이 되니 한 번 해볼까?' 정도였다.


동시를 쓰시는 작가님과 함께 4주 동안 매주 월요일에 만났다. 40대면서 대부분 학부모인 열댓 명이 모였다. 주제가 '내 자녀에게 해 주고 싶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기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들이 경기도 곳곳에서 찾아왔다.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내 아이에게 얘기해 주고픈 나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추억들을 소환했다. 첫 시를 쓰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느낌이 찾아왔다. 시를 쓰려고 보니 내게 즐거운 기억이 너무나도 많았다.   


신이 나서 오랜만에 시를 썼다. 아니, '어린이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들려주려고 쓴 시'라는 동시를 썼다. 그리고 몇 번의 수정, 동기들의 합평과 작가님의 조언을 받아 나름 그럴듯한 작품이 되었다.




단감나무 땡감나무



둥글 납작 찐빵같이 생긴 감이 조랑조랑

저건 보나 마나 땡감이다


이것도 땡감 저것도 땡감

땡땡땡! 입으로 내는 실로폰 소리


길쭉하고 아빠 주먹만 한 감이 주렁주렁

이건 보나 마나 단감이다


"아빠,

단감 하나만 따 주세요."


아빠는 손을 쭉 뻗었다가

이내 나무를 덥석 껴안는다


맞은편 정미소 아저씨 외치는 소리

"그거 땡감이에요!"

나무 위 아빠가 되받아치는 소리

"우리 딸이 단감이래요!"


내 손에 들린 감 한 알

옷소매에 슥슥 문질러 한 입 콱 깨무니

땡땡땡! 입 안에서 번개가 친다.


단감나무 땡감나무

아빠는 정말 몰랐을까?





나 혼자 감탄했다. 다른 사람들이 단감인 줄 알았는데 땡감이었을 때의 감정과 느낌을 좀 더 쓰면 좋겠다고 의견을 주었다. 그러나 나에게 중요한 건 마지막 '아빠는 정말 몰랐을까?'라며 여기서 마무리했다. 열 살 때 돌아가신 아빠와의 몇 안 남은 추억이다. 딱 봐도 땡감이었을, 그러나 6살 딸이 단감이라고 우기는 것을 곧이곧대로 듣고 기꺼이 나무에 올라 따 주었던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의 말을 먼저 듣자.'는 신뢰의 마음과 직접 경험을 통해 깨닫게 하려는 교육관을 아빠를 통해 배웠다.


11살 내 딸에게 이 시를 들려줬다. '엄마가 동시를 썼어. 한번 들어봐~" 나 혼자 만족감 200% 충전한 상태에서 아이에게 낭송했다.


"동시가 아니라 그냥 시 같아."


아이의 한마디 평은 굉장히 올곧았다. 내용이 이해도 되고 머릿속으로 상황이 그려지기도 하고 좋은데, 동시가 아니라 시 같다고 했다. 아주 잠깐 욱하는 감정이 눈빛을 스쳤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부분이 구체적으로 동시가 아니라 시 같은지를 물으려다가 다행히 입을 다물었다. 아이가 동시 같지 않다면 아닌 거겠지. 내 동시의 독자는 너니까.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동시는 나에게 쓴 것인가 내 아이에게 쓴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를 위해 썼구나. 내가 아빠를 추억하고 나를 다독이고 내 아이를 키우는 교육철학의 의미를 담아 나 보라고 쓴 시구나. 이렇게 의미와 성찰을 가득 담은 시를 썼다. "어린이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건 깡그리 까먹고, "어른이 어린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만 가득 담았던 것이다.


어린이가 되기로 했다. 어린이의 생각과 감정으로 그 순간에 있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 속의 한 장면을 가져와 동시를 썼다.




아니래요


우리 집 담벼락에 기대 있는 자두나무

우리 것이 아니래요


내가 인사도 해주고

잘 자라라 노래도 불러줬는데


가장 탐스럽고 예쁜 한 알

다 익으면 제일 먼저 따야지 했는데


엄마가 따먹으면 안 된대요

우리 나무가 아니래요


내가 맛있게 키웠는데

왜 안 되죠?





먼저 동시 수업에서 낭송을 했더니 다들 빵 터졌다. 정말 아이의 마음이 느껴진다며 좋아하셨다. 용기를 얻어 집에 돌아와 아이를 붙잡고 다른 동시를 썼으니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보는지 자세를 고쳐 앉고 제법 진지하게 들을 자세를 취했다.


"오. 이건 진짜 동시 같아!"


동시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를 물었다. 아이의 대답은 지극히 단순했다. "재미있어!" 웃긴 것도 재미있는 것이지만, 의미가 있는 것도 재미있는 것이라는 연설을 하려다가 입에 지퍼를 잠갔다. 그 웃긴 것, 의미 있는 것에 대한 것 또한 지극히 나의 관점에서의 해석일 뿐이니.


내가 느낀 동시와 시의 차이는 이렇다. 특히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쓰는 것에 관해서.


동시는 그 순간에 머무른다. 기억의 그 장면 속에서 그때의 어린아이가 되어 느끼는 감정, 생각을 고스란히 옮겨온다. 그러니 표현이 쉬울 수밖에 없고 종횡무진 앞뒤가 재미있는 변주곡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고스란히 그 생각과 마음이 느껴진다.


시는 그 시공간을 지나온 사람이 멀찍이 떨어져서 해석하고 의미를 가득 담는다.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해석이나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후회, '앞으로 이래야지'라는 의지마저 꾹꾹 눌러 담는다. 모든 서사를 시 한 편에 다 담으려고 하니 그래서 글은 점점 길어지고 어른스러운 표현에 교훈이 담긴다. 세상 참 피곤하게 사는 시가 된다.


어른으로서 동시를 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느꼈다. 아이다운 순수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과 공간과 마주한 사람에 집중하는 힘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되돌아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금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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