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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May 31. 2019

해외여행 중 먹는 라면의 맛

포르투에서 라면 먹다 상념에 잠기기 

포르투에서 자주 보이는 음식들로 구성한 가상 메뉴판


첫 며칠은, 

"미쳤다. 너무 맛있는데?"


그다음 며칠은,

"역시 부드럽다, 부드러워. 입에서 녹아."


그리고 최근 며칠은,

"맛있긴 한데, 한식 먹고 싶어(엉엉)."


일주일 이상 해외여행을 하게 되면 그 나라 음식이 아무리 입에 잘 맞는다 하더라도 대부분 한식보다 달거나, 짜거나, 느끼하여 갑자기 입이 쓰거나 속이 느글거릴 때가 있다. 포르투도 예외는 아니었다. 취재를 위해 최대한 현지 방식으로 식사를 하려 노력했기에 우리는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며 올리브유와 버터와 설탕을 차근차근 몸에 쌓아 갔다. 해산물 요리는 여러 번 씹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프란세지냐는 따뜻하고 든든한 음식이지만 매일같이 먹기엔 부담스러웠다. 


신선한 샐러드와 과일은 뱃속의 더부룩함을 몰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 그나마 달고 느끼한 음식을 잘 먹는 내가 이 정도이니 H와 P는 오죽했을까. 프주민 셋의 한식에 대한 갈망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한식을 '수혈'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 




포르투에는 한인마트가 딱 하나 있다. 중(中)인마트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정도로 중국 식재료의 비중이 높다. 그래도 고추장, 된장, 쌈장 등의 양념이나 두부와 팽이버섯 등 포르투 마트에는 없던 한식 재료들이 보이니 참 반가웠다. 방문 목적이었던 라면은 일반 국물 라면 위주로 일고여덟 종류가 비치되어 있었다. 내 선택은 안성탕면. '맵찔이'에겐 딱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만 매운 라면이다. 한글이 아닌 영어로 'Ansungtangmyun'이라 쓰여 있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주황색 패키지를 집어 들며 나는 벌써 기대감으로 마음이 두근거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셋은 각개전투를 시작했다. 오늘만큼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요리를 하기로 한 것. 매운 음식을 잘 먹는 H는 베트남 고추를 넣은 라면과 돼지 목살을 넣은 김치볶음밥을, 얼마 전 블로그에서 한 프랑스 유학생이 김밥 만드는 게시물을 본 P는 얇은 햄과 당근만이 속재료인 김밥을 만들겠다 선언했다. 그리고 나는 양파와 팽이버섯과 달걀을 넣은 '토핑 부자' 라면을 오늘의 수혈 메뉴로 결정했다.


포르투 에어비앤비의 부엌


숙소의 부엌은 그리 넓지 않고 두고두고 먹을 국을 끓일 법한 크기를 제외하면 냄비도 하나뿐이기에 세 명이 동시에 식사를 준비하는 건 불가능하다. H와 P가 쌀을 씻고 불리는 동안 나는 라면 물을 올렸다. 끓는 물에 라면 수프를 푼다. 길게 썬 양파와 뿌리 부분만 살짝 잘라내어 결대로 찢은 팽이버섯을 면과 함께 냄비에 넣는다. 다시 끓어오르면 달걀과 숙주를 넣은 뒤 냄비 뚜껑을 잠시 덮어놓고 기다린다. 1시간 같은 1분이 지나면 끝.


다양한 재료 덕에 씹는 맛이 풍부하고 간은 라면 수프가 알아서 다 맞춰준 한 그릇의 행복이 완성됐다. 김이 펄펄 나는 냄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별 것도 아닌데 감격스러웠다. 



익숙함과 낯섦의 공존. 한 시간 전 한인마트에서 'Ansungtangmyun' 패키지를 마주했을 때의 그 묘한 기분. 이곳의 달걀과 양파는 한국의 그것보다 크고 실하다. 반면에 팽이버섯은 비인기 재료라 신선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평소와 똑같이 조리했는데도 라면 맛이 조금 다르다. 그걸 포크로 둘둘 말아먹고 있는 내 모습을 자각하니 왠지 좀 웃겼다. 눈 앞에는 프라이팬에 통조림 김치를 볶고 있는 H와 김발 없이 김밥을 마느라 고생하는 P가 있었다. 우리는 1만 km가 넘게 떨어져 있는 집밥의 맛을 어설프게나마 재연하고 있었다. 


프주민의 3인 3색 한식 만들기


같은 일상이 반복되면 무기력하고 지루해한다. 막상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설렘과 흥미로움을 느끼다가도 어느새 익숙한 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포르투에서 타일과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건축물들을 보며 감탄했고, 가격 걱정 없이 와인을 양껏 마시며 즐거워했고, 골목마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예쁜 집들을 사진에 담으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한국과 닮은 구석이 있는 포르투의 어떤 면을 발견할 때면 그 이상으로 유쾌해졌다. 1층은 의상 편집샵이고 2층은 카페인, 한남동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곳을 발견했을 때, 우연히 들어간 빈티지 가게에서 광장 시장이 겹쳐 보일 때, 동네 카페에서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성수동에서 자주 보던 노출 콘크리트 인테리어가 눈에 띌 때. 프주민들은 틈만 나면 포르투의 면면에서 익숙한 한국의 향을 감지했다. 


내게 맞는 익숙함과 낯섦의 균형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비슷하지만 안정적인 매일을 살되 취미 생활이나 여행으로 가끔 일탈을 하는 삶이 맞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역마살이 껴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다 자기만의 아지트에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지는 생활이 어울릴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얌전히 상주할 곳을 찾지 못해 발이 가벼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낯섦이 주가 되는 라이프스타일은 원하는 건 아니다. 


그 균형을 언제 깨닫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마음 가는 대로 이리저리 시소를 타보려 한다. 포르투에서도, 그리고 2주 뒤 한국에 돌아가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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