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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May 28. 2019

기차 타고 싶어서 근교 가는 사람, 나야 나

포르투에서 기마랑이스 다녀오기 

여행 와서 맞은 두 번째 일요일은 각자만의 자유 시간으로 채우기로 했다. 첫 번째 일요일은 포르투 도착 바로 다음날이라 짐 정리하랴, 일정 짜랴, 기획 회의하랴 정신이 없어 물에 밥 말아먹듯 순식간에 보냈다. 여행자에게 평일과 주말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한 달짜리 '자발적 출장'을 온 우리에게는 주말다운 주말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나는 '기마랑이스(Guimarães)'에 왔다. 기마랑이스는 포르투에서 기차로 1시간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다.


Q. 왜 이곳에 왔나. 

A. 어젯밤 엄마한테 카톡이 왔다. '기마랑이스? 거기 좋던데. 한번 가봐, 시간 있으면.' 찾아보니 포르투갈 최초의 수도였다고. 인증샷을 부르는 역사적 랜드마크도 있다고. 그래서 왔다. 


랜드마크 성벽▼

포르투갈은 여기서 태어났다


Q. 또 본 건 없나. 

A. 5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브라간사 공장 저택(Paço dos Duques de Bragança)'도 구경했다. 거대한 석조 건물 안에 몇 백 년 전 미술품과 귀족 생활상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저택 외관과 성벽▼


Q. 왠지 교과서적이고 영혼이 없는데.

A. 사실 역대급으로 더웠다. 며칠 사이 기온이 훅 올라 그늘 없이는 밖에서 30분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오늘도 48색 유성 색연필과 A4 사이즈 스케치북과 동행했기 때문에 어깨에 걸린 캉골 크로스백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동행이 헛되지 않도록 기마랑이스에 있는 작은 광장에서 2시간 동안 그림을 그렸다. 아, 물론 나무 그늘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배경 삼아 옹기종기 서 있는 알록달록한 건물들은 그리기에 아주 좋았다.


결과물▼


기마랑이스는 잘 보존된 역사지구(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음)와 현대적인 상점과 가정집들이 조화로운 도시다. 그런데 무더운 일요일의 인구 밀도는 완전히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3시간 넘게 10명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 모두 레스토랑과 카페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유명한 건 다 보고 가야지'라는 의무감에 바삐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나밖에 없는 듯했다. 갑자기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다. 인천 가서 월미도 안 보면 어떠리, 속초 가서 해수욕 안 하면 어떠리, 그리고 기마랑이스 와서 오래된 명소 다 못 보면 어떠리. 내 심신이 만족할 수 있는 코스로 다니면 될 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휴식을 즐기는 하루니까. 


의무감이 증발하니 나른함이 찾아왔다. 가까운 공원으로 거의 기어가다시피 해 그늘 진 벤치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눈을 감으니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찰랑거리는 소리, 아이들이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 이따금씩 저 멀리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등이 들렸다.


벌떡.


백색소음에 귀를 기울이다 벤치에서 잠깐 잠들었다. 시계를 보니 3시 30분, 포르투로의 기차가 출발하기까지 18분 남았다. 구글 지도에 기차역을 검색해보니 도보로 22분 거리였다. 


18 빼기 22는 -4.

...?!


0.5초 만에 잠이 달아났다. 어설프게 짐을 챙겨 무작정 달렸다. 다행히 2분 전 기차역에 도착했다.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기마랑이스를 떠났다. 


Q. 고작 5시간 구경하려고 기차로 왕복 3시간인 곳을 택했는지?

A. 기차 타고 싶어서 근교 여행 온 건데.




상벤투역 승강장 


난 기차가 정말 좋다. 해외여행의 설렘이 공항에서 시작된다면, 근교 여행이 시작되는 기차역에서의 설렘은 그보다 훨씬 크다. 기차가 더 안전하게 느껴지고(실제로는 비행기 사고율이 더 낮다), 무거운 짐 없이 몸만 움직일 수 있어 홀가분하고, 커다란 창으로 바깥 풍경을 얼마든지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게 기차는 목적지까지 가기 위한 단순한 이동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가끔은 목적지에서보다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즐거울 만큼, 마치 오늘처럼.


내가 탄 기차의 내부 모습


2시간 이내의 단시간 이동용 CP(Comboios de Portugal, 포르투갈의 국영 철도)의 모습은 우리나라 지하철과 ITX 그 중간의 모습이었다. KTX나 최소 무궁화호 같은 기차를 상상한 나는 타자마자 당황했다. 2인용 좌석이 두 개씩 마주 보고 있는, 네 좌석이 한 세트인 구조였다. 기차에서 먹으려고 샌드위치에 애플파이까지 사 왔는데 뭔가를 먹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샌드위치는 치즈가 녹진해질 정도로 오븐에 데워진 상태였다. 한 시간 반 동안 샌드위치와 애플파이가 든 종이 박스는 얌전히 내 무릎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샌드위치가 식어가는 게 무릎으로 느껴졌다. 


모든 아쉬움은 창문을 통해 포르투갈의 풍경을 구경하며 싹 잊혔다. 눈에 익은 주황 지붕 도시에서 집보다 나무가 많은 곳, 집들 사이로 작은 강이 흐르는 곳, 인적이라곤 없을 것 같은 산과 언덕뿐인 곳을 차례로 지나며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만큼이나 다양한 것에 대한 생각을 했다. 포르투에서 머물며 좋았던 것과 싫었던 것, 여행자로서의 내가 보완해야 할 것, 보고 싶은 가족과 친구들, 돌아가면 처리해야 할 서울에서의 일들 등. 눈으로는 아름다운 풍경을 담으며 귀로는 좋은 음악을 듣고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 그곳이 바로 기차 안이다. 


그래서 오늘의 어설픈 근교 여행도 마냥 좋았다. 짧게나마 새로운 도시도 구경했고, 그림도 하나 그렸고, 무엇보다 기차를 탔으니까. 


덧붙임)

이 글의 일부도 기차 안에서 썼으니 기차는 생산적인 공간이기까지 하다(올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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