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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May 25. 2019

4시간 기다려 포르투 최고의 일몰을 보다

이곳이 포르투 최고 일몰 맛집이라던데!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꼭 일출이나 일몰을 본다. 올해만 해도 국내에선 속초와 호미곶, 해외에선 대만 단수이와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어제부로 한 곳이 추가되었다. 포르투 모후정원(New!). 모후정원(Jardim do Morro)은 얼마 전 내가 발목 화상을 무릅쓰고 그림을 그리던 곳에서 수직으로 몇 백 미터 위에 있다(참고글 : #2. 보고 있어도 꿈 같은 풍경). 여기가 포르투 최고의 '일몰 맛집'이라는 소문을 듣고 오후 3시 반쯤 집을 나서 한 시간 만에 도착했다. 




16:30

한낮의 모후 정원은 한적하구나. 사방으로 10미터씩 굴러다녀도 충돌 사고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17:00

대학생으로 보이는 9명의 젊은 남녀 무리가 내 앞에 앉았다. 그들 손에는 병으로 된 음료가 하나씩 들려 있다. 개중에는 나도 몇 번 마셔본 슈퍼복(Super bock, 포르투갈 맥주)도 있었다. 오는 길에 하나 사올 걸!


17:30

해가 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 선글라스 없이는 고개를 들 수 없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가 자리 잡았다. 할아버지는 노란색 돗자리를 펴 할머리를 앉혔다. 가죽으로 된 갈색 가방 안에서는 비닐봉지에 담긴 딸기와 바나나가 나왔다.


왁작지껄 떠들던 대학생들이 갔다. 현지인들에게 모후정원은 언제든 올 수 있는 곳이니 굳이 일몰까지 보고 갈 이유가 없겠지. 그들이 떠난 자리에 비둘기와 갈매기가 몰려들었다. 이거 완전 한강공원 같잖아...?


18:30

가차 없이 부는 칼바람에 종이를 날려버린 게 벌써 두 번. 종이를 거의 껴안다시피 한 자세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람을 그리는 건 항상 어렵지만 모후공원 방문객들은 움직임이 거의 없어 도전할 만하다. 


분홍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금발 커플, 남자친구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책을 읽고 있는 갈색 히피펌 여성, 꽤 오랫동안 여행을 다닌 건지 양 팔이 빨갛게 타버린 키 큰 남성 둘. 일몰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은 것 같지만 다양한 자세와 표정의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어 웨이팅 시간이 지루하지만은 않다.  


19:00

취소, 취소. 아니, 해 대체 언제 져? 저녁 장사를 하는 포르투 식당들은 대부분 오후 8시 이후 영업을 시작하는데, 오후 7시도 이렇게 밝은데 누가 저녁 먹을 기분이 나겠냔 말이지.   


20:00

그렇게 한 시간이 또 지났다. 이제야 맨 눈으로 주변을 볼 수 있다. 하늘이 조금 어둑해졌다. 


20:15

하늘 위쪽이 불그스름하다. 제각각 다른 자세로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몸이 모두 한 방향으로 향했다. 이제 정말 해가 지려나 보다.  


20:30

해의 아랫부분이 수평선에 닿았다! 햇빛이 훨씬 더 붉고 강렬해졌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도 줄어들었다. 몇 십명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다. 


20:45 

해가 반쯤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강에 비치던 햇빛 줄기는 사라지고 대신 해 위로 붉은 기운이 만연해졌다. 이 모습을 담기 위해 수십 개의 휴대폰이 깜빡인다. 맛집에 인증샷이 빠질 수 없지. 


20:52

해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수평선 주변의 붉은 빛 만이 해의 존재를 알린다. 레게 머리를 한 젊은 남성 무리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이를 선창으로 다른 사람들도 역시 박수를 치거나 양손을 입에 모아 큰 소리로 일몰의 마무리를 기념했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음에 기뻐하는 건지, 포르투에 여행 온 것이 비로소 실감나 행복한 건지, 아니면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이유 모를 축하를 하는 건지. 그렇다면 한 자리에서 4시간 동안 망부석처럼 일몰을 기다리던 나는 이제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자연의 움직임이라고는 바람따라 흐르는 물결이나 파르르 흔들리는 나뭇잎들, 그리고 날아다니는 갈매기들뿐인 강가나 바닷가에서 1시간 가량 시시각각 하늘이 물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포르투 모후공원의 일몰도 나에게 복잡한 생각 타래를 안겨 주었다. 이곳에서만큼은 '오늘'만을 살아가기로 결심해놓고, '오늘의 마무리'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곳에서 지나간 무수한 어제들과 불안한 내일들에 대해 고민해버렸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가 달아난 곳을 내려다보았다. '주황 총량의 법칙'. 포르투에는 이 법칙이 있는 게 분명하다. 주황머리 지붕들이 어둠 속에서 빛깔을 잃자 가로등이, 작은 가게들의 조명이 강가의 주황색을 대신 채웠다.


나에게 주황색은 '따뜻함과 포근함'이다. 전자는 온도에 대한 것, 후자는 감정에 대한 것이자 내가 느끼는 주황색의 정체성이다. 빨간색도 따뜻하지만, 강렬하다. 노란색도 따뜻하지만, 왠지 발랄하다(미니언처럼). 그 둘을 섞은 주황색은 밝은 기운을 띠면서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다.


동 루이스 다리를 건너 집으로 오는 길에 포르투 야경을 보며 생각했다. 밤에도 주황빛을 잃지 않는 포르투는 한결같이 '포근한 도시'라고. 일몰을 보며 복잡했던 마음을 부드럽게 보듬어주는 힘을 가진 도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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