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9일
인천에서 시카고까지는 대한항공 직항(KE037)을 탔다. 아침에 출발해서 아침에 도착하는 일정이 마음에 들었다.
오토 체크인을 해놓은 터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셀프로 수하물부터 부쳤다. 친구 줄 김치와 화장품 때문인지 평소 나의 여행 짐보다 훨씬 무거웠다. 무게를 재보니 18kg이었다.
환전 신청해 놓은 400달러를 수령하고 바로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추석 당일이라서인지 공항은 생각보다 붐비지 않았다. 갈 사람은 이미 갔다, 이건가.
게이트 근처의 '브알라(VOILA)'라는 카페에서 아이스 라떼 한 잔을 샀다. 혼자 비행기를 타려니 또 걱정이 앞서 입이 말랐다.
2~3년 전부터 비행기가 너무 무섭다. 하늘 위에서 특별한 사건을 겪은 것도 아닌데, 약간의 난기류에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손에서 땀이 난다. 좌석벨트 등이 켜지거나 기체가 흔들린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아버린다. 그리고선 '괜찮아'와 '아무 일도 없을 거야'를 되뇌며 흔들림이 멎을 때까지 기다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걸 알기에 비행기의 흔들림으로부터 내 정신을 교란시킬 것들을 잔뜩 준비했다.
- 책: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 2>를 헌 책방에서 구해왔다.
- 유튜브에서 오프라인으로 저장한 브이로그들과 음악 플레이리스트
- 며칠 전부터 보기 시작한 '나는 솔로' 16기 전편
- (조금이라도 졸리면 잘 수 있게) 목베개, 귀마개, 온열 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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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행 KE037편의 항공기 기종은 B777-300이었다. 좌석은 3-3-3 구조였고, 간격은 꽤 넓었다. 어매니티는 담요, 베개, 슬리퍼, 헤드폰, 양치도구, 물이 전부였다.
비행기는 거의 만석이었다. 둘러보는데 기분 탓인지 나만 긴장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옆자리의 외국인 남성이 자꾸 기침을 했다. 거듭된 에취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이륙한 지 한 시간쯤 지나 첫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된장 덮밥(한식), 소고기 볶음(중식), 치킨 샐러드 중 소고기 볶음을 골랐다. 간장맛 소고기는 조금 짜고 기름졌지만, 빵이 있어서 괜찮았다. 사이드로는 파스타 샐러드, 후식으로는 모카 케이크가 있었다. 맛은 평범했지만 '나는 솔로' 덕분에 식사 시간이 즐거웠다. 그렇게 첫 두 시간이 갔다.
독서등을 켜놓고 책을 두 시간 정도 읽었다. 이미 두 번의 난기류로 각성 상태였다. 식은땀이 나다 안나다를 반복해서인지 손이 차가웠다. 주변의 조언대로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올 걸 그랬나.
이륙한 지 다섯 시간 반이 지나고, 간식이 나왔다. 든 건 별로 없지만 괜찮은 맛의 모닝빵 샌드위치와 따뜻한 치킨 불고기 주먹밥이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이 빨리 가길 바랐다. 옆의 승객은 첫 번째 기내식 이후로는 잠에 든 건지 기침 소리 대신 쉬익쉬익 소리만 냈다. '소음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지 뒤쪽에서 중국 승객(부부로 추측) 두 명이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도착까지 두 시간을 남기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기내식이 나왔다. 잡채밥과 폭찹 중 후자를 골랐다. 두통이 심해 식사를 건너뛸까 했는데 웬걸, 돼지고기가 생각보다 맛있었다. 으깬 감자도 고소 짭짤하니 고기와 잘 어울렸다. 컨디션이 안 좋아도 입맛은 금세 살아났다.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잔여 시간이 세 번이나 10분씩 늘어났다. 도착 시간을 알리는 기내 방송을 듣고 나서야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몸살이 날 것처럼 팔꿈치와 무릎 뒤가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
여행이 좋고, 여행의 시작과 끝인 공항도 좋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괴로워서 슬프다. 그래도 비행기에서 무사히 내렸고, 본격적인 여행은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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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시카고 하늘은 맑았다. 반대로 공항 안은 좀 어두웠다. 사람들을 따라가니 입국 심사 줄이 보였다. 문득 영국인 동료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가끔 혼자 여행하는 동양인 여성에게 까다로운 직원들이 있다고.
이게 까다로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질문을 꽤 많이 받았다.
- 미국은 언제 와 봤는지
- 이번엔 왜 미국에 왔는지, 얼마나 머물 예정인지
- 돌아갈 항공권은 예약했는지 (예약내역서도 보여달라 함)
- 직업이 무엇인지
- (대학원생 친구를 만나러 왔다 하니) 친구네 집에서 머무는지, 호텔에서 머무는지
- 현금은 얼마나 가져왔는지
불친절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쾌한 경험도 아니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지하철이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된다. 그런데 벽돌 같은 배낭과 18kg의 캐리어를 든 사람은 안된다. 체력을 조금이라도 아끼려면 우버 만이 살길이다.
오헤어 공항(O'Hare International Airport)은 2 터미널에 우버 승강장이 있다. 다른 터미널에서는 우버를 호출하려 해도 그 터미널로 이동하라는 메시지가 뜬다. 대한항공은 5 터미널에 착륙하기에 무료 셔틀을 타고 2 터미널로 이동했다. 2 터미널에서 우버를 호출하니 어느 구역에서 기다리라는 메시지가 왔다.
공항에서 친구집까지는 25분 정도 걸렸다. 서울 우리집 문을 나섰을 때부터 19시간 정도가 지난 시점이라 정신은 몽롱하고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두 발이 허공이 아닌 땅에 붙어 있단 안도감에 기분이 서서히 들떴다.
차창 밖으로는 시카고의 낯선 풍경이 지나갔다. 관광 도시가 아니라서인지 한적하고, 평화로웠고, 초록이 많았다.
친구집 건물 앞에 차가 멈췄다. 정면엔 엄청 큰 세븐일레븐이 보였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곳 편의점은 거의 세븐일레븐이다. 완전히 낯선 곳에서 익숙한 걸 마주하면 두 배로 반갑다. 5분쯤 기다리니 100배로 반가운 친구 얼굴이 보였다. 겨우 두 달 만에 보는 건데도 어쩜 이리 반가운지. 근데 또, MBA 공부와 인턴 준비로 친구는 두 달 만에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있었다.
한 달간 잘 부탁해, 시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