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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Nov 26. 2023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2만 보 걸은 날

2023년 10월 2일

LA와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년까지 투어하고 온 친구가 미국 국내선을 타고 시카고로 넘어왔다. 일주일간 유학생 친구의 원룸에서 셋이 오손도손 지낼 예정이다. 친구야 미안하다. 그래도 네가 오라며... 집도 청소하고 빨래랑 설거지도 내가 할게...


여행자 친구는 느린마을 증류주와 소주잔 세트를 선물로 가져왔다. 술, 특히 소맥을 사랑하는 유학생 친구에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내내 캐리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단다. 보람을 느끼고도 남을 만큼 유학생 친구는 엄청나게 기뻐했다. 이곳에서 소주잔은 정말 구하기 힘들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아, 난 뭘 줬냐면, 울리브영에서 화장품을 잔뜩 사갔다. 자기소개할 때마다 '난 50개의 립스틱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는 코스메틱 덕후 친구에겐 나름 맞춤형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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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 친구는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갔고, 여행자 친구와 난 시카고 다운타운에 처음 가보기로 했다. 나는 오전 6시면 정신이 말똥말똥한 초아침형 인간이지만, 친구는 오전 9시나 되어야 눈을 뜬다. 씻고 아침을 먹고 여유롭게 준비하니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오늘도 맑고 선선한 초가을 날씨다. 기차역까지 걸어가는데 마냥 기분이 들떴다. 친구집에서 시카고 시내까지는 기차로 35분쯤 걸린다. 시카고는 대중교통이 꽤 잘 되어 있고, 'Ventra'라는 앱에서 기차나 지하철 표를 살 수 있다,라고 역무원분에게 들었다.


친구도 나도 여행계획을 치밀하게 세우는 편이 아니라, '역에 가면 표를 살 수 있겠지'라고 태평하게 생각했다. 다운타운으로 간다는 우리의 말에 역무원은, '나는 그냥 표를 팔 수도 있지만 Ventra 앱으로 사면 더 싸다'라고 알려줬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만날 때 여행자의 마음은 녹는다.


다운타운행 기차는 2층으로 되어 있었다. 층이 아예 분리된 게 아니라, 2층 가운데는 뚫려 있고 벽을 따라 좌석이 몇 개 붙어 있는 구조라 신기했다. 출근 시간대가 아니라서인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행 중에 기차를 타면 내가 여행하고 있음을 두 배로 실감하게 된다.


다운타운행 2층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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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Ogilvie Transportation Center'에 정차했다. 다운타운 중심으로 가려면 걸어서 20분 정도 이동해야 한다. 그전에 밥부터 먹자. 마침 '타임아웃(Time-out)' 마켓이 근처에 있길래 점심을 거기서 먹기로 했다.


타임아웃은 글로벌 여행 가이드 잡지사다. 웬만한 도시는 타임아웃에 별도 페이지가 있다. 타임아웃은 오프라인으로도 비즈니스를 확장했는데, 그 지역에서 유명한 요리사와 레스토랑과 협업해 몇몇 도시에 대형푸드마켓을 연 것이다. 첫 번째는 포르투갈 리스본이었고, 시카고는 다섯 번째란다.


내부는 넓기도 했고, 천장이 통유리라 더 넓어 보이기도 했다. 가운데엔 넓은 나무 테이블이 있고, 갖가지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타임아웃 마켓 시카고


한참을 고민하다 그리스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그리스식 샐러드에 닭고기를 추가했고, 친구는 시금치 치즈 파이를 골랐다. 세금에 팁까지 포함하니 음식당 20달러가 훌쩍 넘었다. 마켓에서 둘이 5만 원 쓰기는 또 처음이네.


샐러드엔 루꼴라, 토마토, 올리브, 페타치즈가 듬뿍 들어 있었다. 며칠간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었더니 채소 생각이 간절했는데, 만족스러운 양이었다. 파이는 겉은 바삭한 페이스트리에 속은 시금치와 페타치즈로 가득 차 있었다. 은근한 허브향도 나고 맛도 좋았다.


타임아웃 마켓에서 먹은 닭고기 샐러드(왼)과 시금치 치즈 파이(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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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었으니 커피 마셔야지. 블루보틀, 스텀프타운, 그리고 인텔리젠시아. 이렇게를 미국의 3대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라 부른다. 그중에서도 인텔리젠시아는 시카고에서 시작됐다고 하니, 당연히 가봐야지.


콜드브루 한 잔과 플랫화이트 한 잔을 주문했다. 친구는 콜드브루가, 나는 플랫화이트가 더 낫다고 했다. 신맛과 고소한 맛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냐의 차이인 것 같다. 특별히 맛있다기보단 원두의 향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는다. 사실 여유롭게 즐기진 못했는데, 그 이유는 워킹투어를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여러 번 오게 될 인텔리젠시아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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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선 다양한 스타일의 건축물을 찾을 수 있다. 현실감이 안 느껴질 정도로 건물은 크고 높다. 오래된 건물은 물론 현대적인 건물도 각자의 개성이 있다.


어떤 역사를 거쳐 그 개성 있는 모습들이 되었는지 미리 공부를 해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는 걸 어쩐담. 그래서 첫날은 현지인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시카고 곳곳을 걸어 다니는 워킹투어를 신청했다.


가이드의 이름은 톰이었다. 톰의 설명은 자세했고, 온갖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전부 알아듣진 못했지만 시카고의 랜드마크들은 어느 정도 파악했다. 시카고 강을 따라 걷다가 트럼프 타워도 보고, 지상철이 다니는 시끄럽고 생동감 넘치는 거리를 구경하기도 하고, 누구나 볼 수 있게 전시된 샤갈의 모자이크 벽화도 보고, 밀레니엄 파크까지 야무지게 산책했다. 아쉽지만 시카고의 상징과도 같은 콩 모양의 거대 조각품, 'Cloud Gate'는 공사 중이라 멀리서만 봤다.


시카고는 어느 거리를 걸어도 위를 올려다보게 된다. 모든 건축물이 거대해서다. 생김새라도 평범하면 덜 흥미로울 텐데, 외관 디자인이나 구조가 특이하니 자꾸만 전체를 보고 싶어 진다.


시카고 강변(왼)과 시카고 극장(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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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톰은 워킹투어를 마무리하며 가볼 만한 곳을 몇 군데 추천해 줬다. 그중 'Aire Rooftop Bar Chicago'라는 밀레니엄 파크 근처 루프탑 바에서 저녁도 먹고 노을도 보기로 했다.


화려하지 않고 캐주얼한 분위기라 안심했다. 현지인들의 퇴근 후 맥주 한잔 편히 마실만한 공간이었다. 친구와 나는 일은 안 했지만, 햇빛을 받으며 하루종일 걸어 다녔더니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생맥주 두 잔에 미니 햄버거와 타코를 주문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진짜 맛있었다. 고기에선 불향이 나고 채소는 아주 신선했다.


맥주를 앞에 두고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구경하며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 얘기, 일 얘기, 노후 준비 얘기까지.


노을 보면서 맥주 마시는 여행자의 저녁


어느새 밤이 되었고, 오전의 그 루트대로 집에 돌아왔다. 친구는 학교에서 잔뜩 시달린 모양인지 지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하나는 학업으로, 둘은 과도한 걷기로 잔뜩 피곤했다. 그런데도 삼각형 대형으로 앉아 한참을 떠들었다. 시답잖은 얘기만 오가는데 재밌고 편안했다.


시카고 다운타운은 앞으로 수없이 돌아다니겠지만, 첫 만남의 신남과 들뜸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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