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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an 05. 2024

카페에서 일하고 집밥 먹는 여행자의 일요일

2023년 10월 15일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도 개운하게 기상했다. 전날 친구랑 맥주도 마시고 와인도 한 병을 남김없이 비웠는데, 중간에 운동을 해서인지 숙취가 전혀 없었다. 


몸 컨디션은 좋은데 기분은 그저 그랬다. 이유인즉슨, 금 같은 일요일이지만 친구도 나도 할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리쿠르팅 행사들에 우선순위가 밀려 있던 학업을 챙겨야 할 때였다. 중간고사가 코앞이란다. MBA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된 과정임을 간접적으로 알게 됐다. 기회가 된다면 외국대학원을 다녀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는데, MBA는 섣불리 도전하지 말아야겠다. 


현실로 돌아와 내 걱정을 해보자면, 회사에서 새로 투입된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아 개인 시간을 써서라도 미리 읽어야 할 자료들이 있었다. 현 회사는 대행사임에도 야근은 금기시하고, 혹시 하게 되면 나중에라도 그만큼의 시간을 휴가로 소진하라고 권장한다. 업무 자체는 전 회사에서 하던 것과 비슷한데, 문제는 언어다. 지금의 회사는 영국에 있고, 클라이언트도 거의 유럽 브랜드들이라 모든 업무는 영어로 진행된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마다 그 기본세팅값 때문에 남들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어쨌든 언어가 부족한 건 회사가 아니라 내 문제기 때문에 업무 외 시간을 써서 이런저런 문서를 읽는 게 별로 억울하지 않다. 비즈니스 영어 공부 중이라 자기 최면을 걸면 꽤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이상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입사했을 땐 더 심했다. 줌 미팅인데도 스몰토크조차 어려워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메일 하나를 쓸 때도 틀린 표현을 사용할까 두려워 애매한 관용어구는 다 빼고 파파고 같은 문체만 썼더랬다. 


1년 반이 지나니 프리토킹은 '내가 외국인인 걸 알고 뽑았는데 영어가 어떻게 완벽하겠어'라는 뻔뻔함을 장착해 조금씩 말수를 늘렸고, 메일은 팀원들이 참조로 걸어준 것들을 빠짐없이 읽고 조금씩 따라 했다. 어느 정도 업그레이드는 됐는데, 그래도 소프트웨어나 장비 제조업체 등 생소한 산업군의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긴장된다. 왜 여행 중일 때 깜빡이도 안 키고 그런 클라이언트가 새로 유입된 거지? 그래도 다음 주까진 연차가 아닌 정상 근무 예정이니, 뒤쳐지면 큰일이다. 책임감이나 성실함 때문이라기보단 업무 효율성 떨어진다고 '타국에서 근무 금지' 같은 무서운 조항이 생기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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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로 가볍게 시리얼을 챙겨 먹고 친구랑 집을 나왔다. 둘 다 노트북 넣은 백팩을 멘 채로. 행선지는 '필츠커피(Philz Coffee)'라는 카페다. 샌프란시스코를 꽉 잡고 있다는 커피 브랜드란다. 필츠커피는 2003년에 캘리포니아에서 탄생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입소문을 타며 유명해졌다. 마크 주커버그가 단골인 커피 브랜드임이 알려지며 입지가 더 단단해졌다고.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에서만큼은 '스타벅스의 대항마'라 불린단다. 


ⓒ필츠커피 홈페이지


포브스(Forbes)에서 필츠커피를 소개하는 영상(링크)을 봤는데, 필츠커피만의 차별점은 이렇게 두 가지였다. 

- 하나, 에스프레소 베이스가 아닌 푸어오버 방식을 기본으로 커피 음료를 만든다는 것

- 둘, 대표 원두를 고르는데 7년이 걸릴 만큼 원두 선정에 공들인다는 것

수식어가 화려한 그 커피를 시카고 다운타운도 아니고 근교인 에반스톤에서 맛볼 수 있다니 신나는 일이다.


ⓒ필츠커피 홈페이지


클래식한 양식의 벽돌 건물에 필츠커피의 로고만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출입문엔 할로윈 기념 유령 모빌이 걸려 있고, 위엔 'One cup at a time(한 번에 한 잔씩)'이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아닌 푸어오버 방식으로 커피를 추출하며 고객의 입맛에 맞게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다는 필츠커피의 자부심을 담은 문구다.



매장은 꽤 넓었고, 노트북 작업하는 사람이 많았다. 천장이 높아 매장 안쪽의 통창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시원하고 쾌적하게 느껴졌다. 


뭘 마실지 고민하며 카운터 앞으로 갔는데, 콜드브루 홍보가 한창인 듯했다. 그러면 또 마셔봐야지. 친구는 이곳의 시그니처 음료라는 '민트 모히토(Mint Mojito)'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민트랑 초코의 만남은 익숙해도 커피와는 생소했다. 몇 입 마셔봤는데,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민트의 화함이 별로 강하지 않았고, 커피 자체가 살짝 산미가 있는 편이라 둘이 따로 노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입엔 콜드브루가 더 맛있었다! 사실 주문할 때 5달러라길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핸드드립도 아닌 커피가 우리나라 돈으로 8천원 정도라니. 맛이 별로면 두 배로 혹평하려 했는데, 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콜드브루인데도 산미가 거의 없어 신기했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앉아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들도 꿈적 않고 책이나 노트북에 몰입해 있길래 마음 편히 느긋한 분위기의 일부가 됐다. 일요일에 회사 일을 하는 게 썩 유쾌하게 들리진 않겠지만, 돌이켜보니 나름 평화롭고 그리운 순간으로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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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됐다 싶은 타이밍이 잘 맞아, 출출할 때즈음 후련한 마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며 로제찜닭을 해 먹자고 의견을 모았다. 자꾸 한식 타령을 해서인지, 우리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통 찜닭 레시피와 먹방 영상이었다. 친구는 영상 몇 개를 유심히 보더니 '나도 만들 수 있겠다'며 이틀 전에 한국인 동기들과 아시아 식재료 전문인 'H 마트'에 다녀왔다. 닭 허벅지살과 고추장을 사 왔단다. 야채와 생크림은 동네 마트에서 싸게 샀고, 고춧가루는 친구 어머님께 받아 한국에서 내가 들고 왔다. 이미 재료는 다 준비돼 있다. 


친구는 지치지도 않는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유에 닭을 재우고 레시피 영상을 다시 찾아봤다. 30분 후 프라이팬에 닭을 굽고,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넣어 양념을 하고, 깍둑썰기한 야채를 듬뿍 넣고 보글보글 끓였다. 다홍빛 국물은 생크림을 붓자 부드러운 주황색으로 변하며 진득해졌다. 이거 영상에서 보던 그 비주얼이잖아. 당면 대신 파스타면까지 넣고 뭉근하게 졸여 완성했다. 


마트에서 사 온 로제와인까지 세팅해 놓고 사진을 찍었다. 고생한 친구에게 시카고에서 한식당을 열자느니, 요리 유튜브를 개설하자느니 너스레를 떨었다. 먹어보니 헛소리를 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정말 식당에서 팔 법한 맛이 나서다! 매콤하지만 부드러운 한국식 로제 소스는 상큼한 로제와인과 찰떡이었다. 



맛있는 음식과 술에 흥이 오른 우린 건물 1층 세븐일레븐에 갔다. 하루종일 기분 좋은 일의 연속이었으니 복권이라도 사보자. 잔돈이 부족해서 10달러짜리 파워볼 말고 1달러짜리 즉석 복원을 샀다. 같은 숫자 세 개가 나오면 그 숫자에 해당하는 금액에 당첨되는 시스템이었다. 갈갈갈... 오, 2달러 당첨이다. 일확천금의 꿈은 오늘도 이렇게 멀어지는구나. 그래도 1달러 투자해서 2달러 번 거면 우리 수익률 100%잖아. 



몇 달 전까지 이 친구와 논현동 투룸에서 자취했는데, 그때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회사원인데 우린 왜 주말에도 바쁘냐며 친구는 MBA 학원 책을, 나는 프리랜서 일거리를 붙들고 동네 카페에서 오전을 종종 보냈다. 배고프면 집으로 돌아와 친구가 요리하는 동안 나는 세탁기와 청소기를 차례로 돌렸다. 술 좋아하는 친구와 디저트 좋아하는 나는 김치찜에, 보쌈에, 스테이크에 와인을 마시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밤늦은 시간까지 낄낄댔더랬다. 


지구 반대편인 시카고에서 그 익숙한 순간을 다시 경험하니 기분이 묘했다. 시카고에 오기 전, 내가 기대했던 건 시카고란 도시가 선물할 새로움만이 아닌 친구와 함께했던 소박하고 일상적인 순간들의 재현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러모로 오길 잘했어,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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