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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Dec 31. 2023

여행과 일상 사이의 토요일

2023년 10월 14일

인간은 참 간사한 동물이란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지난주 토요일은 친구들과 일주일간 놀며 여행하다 맞이했더니 주말이 더 반갑다거나 마음이 여유롭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토요일은 평일에 며칠 회사 일을 했다고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여행 중이라도 온전한 휴가일 때와 워케이션일 때는 주말이 갖는 의미가 다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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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개운하게 눈을 뜬 토요일 아침. 마침 날씨도 오랜만에 맑다. 이 산뜻한 기분을 극대화할 수 있는 건 뭘까. 옳지, 라면을 먹어야겠어!


평소엔 라면을 잘 안 먹는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막상 먹으면 맛있게 한 봉지를 뚝딱 해치우는데, 그냥 잘 생각이 안 난다. 그런 내가 눈뜨자마자 라면 생각을 한 건 매운맛이 그리워서다. 분명 친구가 제육볶음을 해준 게 엊그제인데, 기름진 음식 몇 끼 먹었다고 또 매운맛 타령이다. 


밤늦게까지 리쿠르팅 행사에 참여했던 친구와, 한국 시간대에 맞춰 일하다 애매하게 밤낮이 바뀐 나. 둘 다 요리를 하기엔 피곤하고 귀찮았다. 이럴 땐 물만 올리면 되는 라면이 최고지. 세상에서 제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한국식 매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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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네 원룸엔 일자로 싱크대와 라스레인지가 있고, 그 위엔 여러 칸의 선반이 있다. 그중 가장 오른쪽 칸은 '라면 전용'이란다. 열어보니 신라면 일반과 건면, 까르보불닭볶음면, 진라면 매운맛, 그리고 짜파게티까지 빈 공간 없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미국인들은 여기 시리얼 박스 보관하겠는데?"

"있어, 시리얼도."

"엥, 어디?"

"라면 뒤에."

라면 몇 개를 치우니 정말 시리얼 박스들이 있었다. 건강하게 먹어보려 오트밀이랑 귀리 시리얼을 샀다는데, 맛이 없어서 오레오 오즈랑 섞어먹는다고. 결국 맛있는 라면이 전방위에 배치됐다. 


유학생의 라면 전용 칸이 있는 선반


한참을 고민하다 신라면 건면 한 봉지에 일반 한 봉지를 섞어 끓이기로 했다. 건면이 더 맛있지만 미국에서 구하긴 힘들다기에 적당히 타협했다. 계란도 두 개 넣었다. 오랜만에 먹는 국물라면은 천상의 맛이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라면만큼은 누구랑 같이 먹어야 맛있게 느껴진다. 


잊지 못할 신라면의 맛


배불렀지만 후식도 포기 못하지. 친구가 전날 리쿠르팅 행사에서 받아온 걸 주섬주섬 꺼냈다. 작은 가렛팝콘 패키지와 치즈 안주였다. 미국의 회사들은 행사에서 이런 걸 나눠주는구먼. 치즈는 나중에 와인 마실 때 꺼내 먹기로 하고, 가렛팝콘을 뜯었다. 


시카고를 대표하는 간식, 가렛팝콘. 단독 매장도 시카고 곳곳에 있지만 패키지 형태로 영화관, 스포츠 경기장, 마트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가장 흔한 조합인 '가렛믹스(Garrett Mix)'엔 캐러멜과 치즈가 반반 들어있다. 간식 리뷰글에도 썼지만, 가렛팝콘은 캐러멜 코팅된 게 압도적으로 맛있고, 특히 피칸이나 아몬드 등 견과류 들어간 게 비싸지만 최고다. 


컨설팅펌에서 나눠 준 간식 (친구가 받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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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친구는 또 스터디가 있어 나가야 했고, 일정이 없는 난 산책 겸 따라나섰다. 노스웨스턴 대학 캠퍼스는 안에 녹지가 정말 많은데, 그래서인지 다양한 동물들이 출몰한다. 오늘은 오리 군단이구나. 아침과 다르게 비바람이 부는 쌀쌀한 날씨였는데 오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자적 무리 지어 걸어 다녔다. 


강풍에도 페이스 유지하는 오리들


점심은 느지막이 벼르고 벼르던 '구스 아일래드 브루하우스(Goose Island Brewhouse)'가서 먹기로 했다. IPA 맥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마셔봤을 구스 아일랜드. 구스 아일랜드의 탄생지는 시카고고, 그래서 이 도시엔 커다란 브루어리가 있다. 사실 난 선택지가 있다면 무조건 라거인데, 생맥주면 다 좋지 뭐. 


구스 아일랜드는 맥주 이름이기 이전에 시카고에 있는, 철새들의 보금자리였던 자연섬의 이름이었다. 지역을 확장하고 위치를 옮기며 지금의 구스 아일랜드는 근처 인공섬의 이름이 됐다. 그게 1800년대 이야기니 구스 아일랜드 맥주는 어느 쪽 섬의 이름을 따왔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구스 아일랜드의 탄생은 존 홀(John Hall)이라는 청년이 유럽 여행을 하다 "미국도 이런 높은 퀄리티의 맥주를 마실 자격이 있다!"란 생각으로 고향인 시카고에 맥주 양조장을 열었다. 지금은 서울을 포함해 여러 나라에 브루하우스를 열었고, 시카고엔 'Fulton ST.'와 'Clybourn' 두 곳에 지점이 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후자다. 


North/Clybourn 역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거위 머리 모양의 로고가 그려진 벽돌 건물이 나온다. 벽을 따라 파이프가 길게 달려 있는 게 신기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 분이 바에 앉을지 홀에 앉을지 물어봤다. 바에 앉은 사람들은 앞에 맥주 한 잔씩을 두고 위에 달린 커다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미식축구가 한창이었다. 우리나라 축구도 잘 안 보는 마당에 해외 미식축구에 관심이 있을 리가. 저희는 홀로 갈게요. 


구스 아일랜드 브루하우스 외관
구스 아일랜드 부르하우스 내부


안쪽의 홀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테이블도 많고 단체석도 있었다. 커다란 냉장고에는 캔과 병으로 파는 맥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박스 채로 사가는 분도 있단다. 


친구와 메뉴판을 보니 여러 종류의 생맥주가 있었는데, 라거도 두 가지나 있었다! 잠깐의 눈빛 교환 후 둘 다 도수가 더 높은 라거 맥주를 골랐다. 안주로는 닭가슴살 나초칩을 주문했다. 


역시 라거다. 벌컥벌컥 마셔도 목 넘김이 부드럽다. 사실 맥주는 익숙한 맛이었는데 안주에서 놀랐다. 나초칩이 닭가슴살 샐러드 한쪽에 놓여 있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양이 엄청난 나초 '언덕'이 나왔다. 각종 야채와 닭가슴살이 나초 사이에 듬뿍 들어 있고, 위에 사워크림이 뿌려져 있다. 


그렇게 맥주는 한 잔에서 두 잔이 되고, 산더미 나초는 빈 접시만 남았다. 여느 친한 친구와의 술자리가 그렇듯,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가 오갔다. 외국 대학원이라는 새로운 사회 안에서 치열하게 적응 중인 친구와, 외국 회사의 한국인 직원으로 원격근무하는 나. 서로의 힘듦을 듣기도, 말하기도 하다가 두 시간이 갔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던 산더미 나초, 그리고 맥주 두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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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는 길에 와인을 한 병 샀다. 맥주로 오른 흥, 와인으로 불사지르자는 마음으로. 근데 바로 또 마시기엔 너무 배부르니 아무래도 운동을 좀 해야겠다. 친구집 건물 2층엔 헬스장이 있는데, 여행 초반부터 격일로 한 시간 정도씩 혼자 유산소 운동을 했다. 여행 중에도 일상에서의 루틴을 가능한 선에서 유지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오늘은 친구와 함께 헬스장에 왔다. 역시나 우리뿐이다. 헬스장에 이렇게 사람이 없어도 운영에 문제가 없는 건가, 하는 외부인의 쓸데없는 걱정을 밀어 두고 러닝 머신에 올라갔다. 한국에서 여행할 때 가끔 호텔 헬스장을 같이 가곤 했는데, 4-50분씩 쉼 없이 달리는 날 보고 친구가 매번 놀렸다. 


이번에도 역시나 잔뜩 놀림받았다. 나는 누구나 러닝 머신은 한 시간씩 뛰는 줄 알았는데 보통은 다른 운동 전후에 가볍게 뛰어주는 거라고. 운동도 독학해서 몰랐지 뭐야. 


그리고 혼자 왔을 땐 차마 도전하지 못한 운동기구가 있었으니, 나무 막대기가 사다리처럼 연결돼 있는 구조다. 위쪽 바를 손으로 쥐고 아래쪽 바를 차례차례 밟으며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하는 기구인데, 영 자세가 안 나왔다. 고개를 돌려 거울로 내 모습을 슬쩍 봤는데, 이보다 웃길 수가 없다. 


문제의 그 운동 기구


하던 대로 운동 마무리하고 싹 씻고 친구랑 마트에서 산 화이트 와인을 땄다. 안주는 냉장고에 있던 치즈들과 패밀리 사이즈로 사서 야금야금 먹고 있는 치토스 퍼프. 태블릿으로 아무 영상이나 틀어놓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토요일, 나에겐 여행이고 친구에겐 일상인 하루가 이렇게 지나갔다. 


와인으로 마무리하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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