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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일하고 집밥 먹는 여행자의 일요일

2023년 10월 15일

by 이재인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도 개운하게 기상했다. 전날 친구랑 맥주도 마시고 와인도 한 병을 남김없이 비웠는데, 중간에 운동을 해서인지 숙취가 전혀 없었다.


몸 컨디션은 좋은데 기분은 그저 그랬다. 이유인즉슨, 금 같은 일요일이지만 친구도 나도 할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리쿠르팅 행사들에 우선순위가 밀려 있던 학업을 챙겨야 할 때였다. 중간고사가 코앞이란다. MBA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된 과정임을 간접적으로 알게 됐다. 기회가 된다면 외국대학원을 다녀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는데, MBA는 섣불리 도전하지 말아야겠다.


현실로 돌아와 내 걱정을 해보자면, 회사에서 새로 투입된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아 개인 시간을 써서라도 미리 읽어야 할 자료들이 있었다. 현 회사는 대행사임에도 야근은 금기시하고, 혹시 하게 되면 나중에라도 그만큼의 시간을 휴가로 소진하라고 권장한다. 업무 자체는 전 회사에서 하던 것과 비슷한데, 문제는 언어다. 지금의 회사는 영국에 있고, 클라이언트도 거의 유럽 브랜드들이라 모든 업무는 영어로 진행된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마다 그 기본세팅값 때문에 남들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어쨌든 언어가 부족한 건 회사가 아니라 내 문제기 때문에 업무 외 시간을 써서 이런저런 문서를 읽는 게 별로 억울하지 않다. 비즈니스 영어 공부 중이라 자기 최면을 걸면 꽤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이상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입사했을 땐 더 심했다. 줌 미팅인데도 스몰토크조차 어려워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메일 하나를 쓸 때도 틀린 표현을 사용할까 두려워 애매한 관용어구는 다 빼고 파파고 같은 문체만 썼더랬다.


1년 반이 지나니 프리토킹은 '내가 외국인인 걸 알고 뽑았는데 영어가 어떻게 완벽하겠어'라는 뻔뻔함을 장착해 조금씩 말수를 늘렸고, 메일은 팀원들이 참조로 걸어준 것들을 빠짐없이 읽고 조금씩 따라 했다. 어느 정도 업그레이드는 됐는데, 그래도 소프트웨어나 장비 제조업체 등 생소한 산업군의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긴장된다. 왜 여행 중일 때 깜빡이도 안 키고 그런 클라이언트가 새로 유입된 거지? 그래도 다음 주까진 연차가 아닌 정상 근무 예정이니, 뒤쳐지면 큰일이다. 책임감이나 성실함 때문이라기보단 업무 효율성 떨어진다고 '타국에서 근무 금지' 같은 무서운 조항이 생기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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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로 가볍게 시리얼을 챙겨 먹고 친구랑 집을 나왔다. 둘 다 노트북 넣은 백팩을 멘 채로. 행선지는 '필츠커피(Philz Coffee)'라는 카페다. 샌프란시스코를 꽉 잡고 있다는 커피 브랜드란다. 필츠커피는 2003년에 캘리포니아에서 탄생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입소문을 타며 유명해졌다. 마크 주커버그가 단골인 커피 브랜드임이 알려지며 입지가 더 단단해졌다고.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에서만큼은 '스타벅스의 대항마'라 불린단다.


Philz_LocationsLP_19_SanMateo.jpg ⓒ필츠커피 홈페이지


포브스(Forbes)에서 필츠커피를 소개하는 영상(링크)을 봤는데, 필츠커피만의 차별점은 이렇게 두 가지였다.

- 하나, 에스프레소 베이스가 아닌 푸어오버 방식을 기본으로 커피 음료를 만든다는 것

- 둘, 대표 원두를 고르는데 7년이 걸릴 만큼 원두 선정에 공들인다는 것

수식어가 화려한 그 커피를 시카고 다운타운도 아니고 근교인 에반스톤에서 맛볼 수 있다니 신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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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츠커피 홈페이지


클래식한 양식의 벽돌 건물에 필츠커피의 로고만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출입문엔 할로윈 기념 유령 모빌이 걸려 있고, 위엔 'One cup at a time(한 번에 한 잔씩)'이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아닌 푸어오버 방식으로 커피를 추출하며 고객의 입맛에 맞게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다는 필츠커피의 자부심을 담은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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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은 꽤 넓었고, 노트북 작업하는 사람이 많았다. 천장이 높아 매장 안쪽의 통창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시원하고 쾌적하게 느껴졌다.


뭘 마실지 고민하며 카운터 앞으로 갔는데, 콜드브루 홍보가 한창인 듯했다. 그러면 또 마셔봐야지. 친구는 이곳의 시그니처 음료라는 '민트 모히토(Mint Mojito)'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민트랑 초코의 만남은 익숙해도 커피와는 생소했다. 몇 입 마셔봤는데,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민트의 화함이 별로 강하지 않았고, 커피 자체가 살짝 산미가 있는 편이라 둘이 따로 노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입엔 콜드브루가 더 맛있었다! 사실 주문할 때 5달러라길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핸드드립도 아닌 커피가 우리나라 돈으로 8천원 정도라니. 맛이 별로면 두 배로 혹평하려 했는데, 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콜드브루인데도 산미가 거의 없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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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세 시간을 앉아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들도 꿈적 않고 책이나 노트북에 몰입해 있길래 마음 편히 느긋한 분위기의 일부가 됐다. 일요일에 회사 일을 하는 게 썩 유쾌하게 들리진 않겠지만, 돌이켜보니 나름 평화롭고 그리운 순간으로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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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됐다 싶은 타이밍이 잘 맞아, 출출할 때즈음 후련한 마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며 로제찜닭을 해 먹자고 의견을 모았다. 자꾸 한식 타령을 해서인지, 우리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통 찜닭 레시피와 먹방 영상이었다. 친구는 영상 몇 개를 유심히 보더니 '나도 만들 수 있겠다'며 이틀 전에 한국인 동기들과 아시아 식재료 전문인 'H 마트'에 다녀왔다. 닭 허벅지살과 고추장을 사 왔단다. 야채와 생크림은 동네 마트에서 싸게 샀고, 고춧가루는 친구 어머님께 받아 한국에서 내가 들고 왔다. 이미 재료는 다 준비돼 있다.


친구는 지치지도 않는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유에 닭을 재우고 레시피 영상을 다시 찾아봤다. 30분 후 프라이팬에 닭을 굽고,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넣어 양념을 하고, 깍둑썰기한 야채를 듬뿍 넣고 보글보글 끓였다. 다홍빛 국물은 생크림을 붓자 부드러운 주황색으로 변하며 진득해졌다. 이거 영상에서 보던 그 비주얼이잖아. 당면 대신 파스타면까지 넣고 뭉근하게 졸여 완성했다.


마트에서 사 온 로제와인까지 세팅해 놓고 사진을 찍었다. 고생한 친구에게 시카고에서 한식당을 열자느니, 요리 유튜브를 개설하자느니 너스레를 떨었다. 먹어보니 헛소리를 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정말 식당에서 팔 법한 맛이 나서다! 매콤하지만 부드러운 한국식 로제 소스는 상큼한 로제와인과 찰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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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과 술에 흥이 오른 우린 건물 1층 세븐일레븐에 갔다. 하루종일 기분 좋은 일의 연속이었으니 복권이라도 사보자. 잔돈이 부족해서 10달러짜리 파워볼 말고 1달러짜리 즉석 복원을 샀다. 같은 숫자 세 개가 나오면 그 숫자에 해당하는 금액에 당첨되는 시스템이었다. 갈갈갈... 오, 2달러 당첨이다. 일확천금의 꿈은 오늘도 이렇게 멀어지는구나. 그래도 1달러 투자해서 2달러 번 거면 우리 수익률 100%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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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까지 이 친구와 논현동 투룸에서 자취했는데, 그때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회사원인데 우린 왜 주말에도 바쁘냐며 친구는 MBA 학원 책을, 나는 프리랜서 일거리를 붙들고 동네 카페에서 오전을 종종 보냈다. 배고프면 집으로 돌아와 친구가 요리하는 동안 나는 세탁기와 청소기를 차례로 돌렸다. 술 좋아하는 친구와 디저트 좋아하는 나는 김치찜에, 보쌈에, 스테이크에 와인을 마시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밤늦은 시간까지 낄낄댔더랬다.


지구 반대편인 시카고에서 그 익숙한 순간을 다시 경험하니 기분이 묘했다. 시카고에 오기 전, 내가 기대했던 건 시카고란 도시가 선물할 새로움만이 아닌 친구와 함께했던 소박하고 일상적인 순간들의 재현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러모로 오길 잘했어,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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