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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an 07. 2024

근무 중간에 시카고 미술관 다녀온 썰

10월 16일

12일자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거였다.

"과연 다음날부터 근무 시간을 조정할 수 있을지? 다음 편에 계속..."

그러니까 이건 시카고에서 한국 시간대에 맞춰 일하겠노라 호기롭게 선언한 직장인의 후회가 담긴 문장이다.

내가 야행성이었다면 가능했겠지만, 사실 아침형을 너머 새벽 대여섯 시에 눈 뜨는 새벽형 인간이다. 일의 효율도 오전이 제일 높다. 그걸 스스로 제일 잘 알면서도 굳이 굳이 한국 시간대에 맞춰 시카고에서 새벽 두 시까지 일하겠다고 한 건 실수였다. 매니저에게 '여행 중이니 근무 시간대를 조정해 달라'는 요청은 이전까지 서울 사무실에서 나인투식스로 일해온 한국 직장인에게는 어쩐지 부끄럽고 뻔뻔하게까지 느껴졌다.


유럽인 팀원들은 휴가 때 앞뒤로 이삼주 씩 다른 나라에서 일한다. 영국 사는 중국인 동료는 명절마다 중국에 가서 한두 달씩 원격근무를 한단다. 알고 보니 그들은 당연하게도 여행 중인 나라의 환경에 맞게 일했다. 오히려 내가 특이 케이스였던 거다.


한국의 월요일 아침은 시카고의 일요일 저녁이다. 이상한 근무 스케줄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15일자 글의 마지막은 친구와 와인 마시고 즉석 복권 긁는 에피소드가 아니었을 거다. 코워킹 스페이스로 내려가 노트북을 펴놓고 새벽엔 잠과의 사투를 벌였을 거다. '그랬을 거다' 식으로 얘기하는 건 실제론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근무 시간대 조율에 성공했다!


13일 금요일에서 14일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매니저에게 짧은 면담을 요청했다. 모든 말이나 행동에 머뭇거림이 없는 그는 곧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시카고는 어떤지 스몰토크를 좀 나누다가 용건을 꺼냈다. 번복해서 미안하지만 이곳 시간대에 맞춰 일해도 되겠냐고. 그는 안 그래도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아 똑같은 제안을 월요일에 하려 했단다. 미국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 시차가 이렇게 정반대인지 몰랐다고.


한참 고민한 이슈가 이렇게 20분도 안 되어 해결되어 좋은 의미로 허무했다. 원격근무가 가능한 회사고, 무엇보다 업무 효율성이 우선일 테니 어찌 보면 원래부터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근데도 며칠을 망설였던 건 그동안 지나온 회사 생활의 영향이다. 야근이 대수롭지 않았던 첫 회사부터 심지어 정시퇴근은 일에 진심이 아님을 증명한다는 듯 은근히 눈치 주던 스타트업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과 일의 양이 정비례 그래프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꽤 많이 만났고, 내향적인 데다 모범생 코스프레가 익숙한 난 그 암묵적인 강요에 익숙해졌다.


그러다 시간이 아닌, 매일 처리하는 태스크 양이 중요한 회사에 왔다. 과반수의 직함이 스페셜리스트라 사수와 부사수의 개념이 없고, 매니저 외엔 모두가 수평적인 관계다. 못해도 이삼일 주기로 투두리스트가 업데이트되니 일을 조금이라도 느긋하게 하면 금세 티가 나는 구조다. 조직문화는 (나에게 맞는 조직을 아직 못 찾아서인지) 싫어해도 일하는 건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딱이다. '투두(to do)'를 '던(done)'으로 바꿀 때마다 작은 성취감과 후련함을 느낀다.


그래서 매니저와 합의한 건, 시카고 시간대로 일하되 특이사항이 있을 땐 팀 회의든 클라이언트 미팅이든 참여하면 된다는 거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말인데, 그 반대의 경우를 많이 보고 겪은 나로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감동이었다. 청년내일채움공제를 왜 지원해줘야 하냐며 찡그리던 얼굴, 식비 지원도 안 해주면서 도시락 싸와서 따로 먹었더니 사회생활을 잘 못하는 거 아니냐는 등의 목소리들이 떠오른다. 지금의 회사도 이상한 점들이 당연히 있지만, 근무 환경만 놓고 봤을 때는 직원들에게 훨씬 너그러운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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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마음의 짐을 덜고 새롭게 한 주를 시작했다. 유럽 팀원들은 늦어도 시카고 기준 낮 12시면 일이 끝나기에, 오전에 최대한 많이 일하고 오후엔 관광을 하고 저녁엔 집에서 나머지 일을 하기로 했다.


아침으로는 스타벅스의 '브렉퍼스트 페이보릿(Breakfast Favorites)' 중 하나를 먹어봤다. 스타벅스에 갈 때마다 맥머핀 같은 빵들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는데, 드디어 실제로 먹어보는군. '소시지, 체다&에그 샌드위치'에 펌킨크림 콜드브루를 주문했다. 샌드위치는 맛도 맥머핀과 비슷했다. 가격은 거의 6천원이지만 이 나라는 맥도날드도 비싸기에 참을 수 있다. 계란도 보들보들하고 떡갈비 같은 소시지도 따끈따끈해서 든든했다. 빵은 흔히 아는 잉글리시 머핀이었고, 질기지 않아 좋았다. 펌킨크림 콜드브루는 바닐라크림 콜드브루에 호박맛 시럽과 시나몬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오전엔 필요한 일을 했으니 오후는 여행자 모드로 자유를 만끽해야지. 오늘의 여행 계획은 딱 하나다. 밀레니엄 파크 옆엔 시카고 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이 있는데, 이걸 샅샅이 구경하는 것. 보통 명사 같은 이름을 갖게 된 건 엄청난 규모의 건물과 안의 컬렉션 때문일까.


시카고 미술관은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데, 도시 안에 엄청난 규모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는 게 참 좋다. 바쁜 일상이라도 잠깐 산책을 하거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란 게 부럽다.



외관에서 짐작했지만, 시카고 미술관은 가로로 엄청 긴 3층 건물이다. 지하부터 2층까지 있는데, 구조가 꽤 복잡해서 모든 방문객들이 손에서 지도를 놓지 못한다. 이곳엔 30만 점이 넘는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단다. 입장료는 일반 성인 기준 32달러였다. 나중에 깨달은 건데, 입장료가 30달러 이상이면 두세 시간 이상 구경할 만한 거리가 많고 공간도 크다. 15달러 미만이면 전시실이 단층인 경우가 많고, 한두 시간이면 여유롭게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다.


시카고 미술관의 건물 설계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스타일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전시관은 통유리로 구분되어 있고, 각층은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한다. 인상적이었던 건 층간의 공간에도 공을 많이 들였단 거다. 벽에 스테인드 글라스를 걸어놓거나, 유리 천장에 컬러 필름을 붙인 작품을 기획해 놓는 등의 볼거리가 많다. 그래서 미술관 안의 작품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가 하나의 예술처럼 느껴진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은 좋아하지만 관련 지식은 종잇장 같은 사람이라, 오디오 가이드와 리플릿을 참고해 스탬프 투어하듯 주요 작품을 선택적으로 구경했다. 미술관의 안내사항엔 '사진을 적극 권장함'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관광객이 휴대폰을 잘 꺼내지 않고 눈으로만 열심히 구경하더라. 차분하면서도 여유로운 그 바이브가 좋아 나도 가끔씩만 사진을 찍었다. 왠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기분이었는데, 정신 차리고 시계를 보니 세 시간이 지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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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는 지상철이 잘 되어 있다. 미술관에서 가까운 역에서부터 친구 집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퍼플라인은 출퇴근 시간대에만 운영한다. 그동안은 묘하게 타이밍이 안 맞아 꼭 한 번 정도는 갈아탔는데, 처음으로 직행선을 타게 되어 기분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 가볍게 과일로 저녁 식사를 대신했다. 단단해서 맛있었던 사과와 단단해서 맛없었던 납작 복숭아로. 싹 씻고 짐 챙겨서 코워킹 스페이스로 내려갔다. 세 시간 정도 이런저런 일을 하고 나니 아홉 시였다. 졸리지 않은 또랑또랑한 상태에서의 업무 마무리라니, 너무 감사하다. 아침저녁으로 일을 나눠서 하니 지루하지 않고 집중도 잘 됐다. 방으로 돌아오니 친구가 책상에 앉아 이력서 업데이트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너무 늦지 않게 누웠고, 수다 떨다 언젠지 모르게 잠들었다.


이런 리듬으로는 장기 워케이션도 얼마든지 가능하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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