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걷는 오페라 #1
우아하고 아름다운, 때로는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아리아들은 대체로 이탈리아어 가사로 쓰여, 의미와는 무관하게 그저 선율로, 화려한 화음으로, 성악가의 역량으로 감동을 안겨줄 뿐입니다.
물론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그 노랫말의 정서가, 스토리의 맥락이, 인물의 위대한 품성과 힘이 더욱 격렬한 어떤 감정을 불러오겠지만, 그 나라 말을 모르는 이들에게 언어로서 즉각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길은 없겠죠. 덕분에 아리아의 고상한 선율만이 기억 속에 추억처럼 남곤 합니다.
오페라 ‘나비부인’. 낮은 음조와 작은 볼륨으로 끈질기게 이어지는 ‘허밍 코러스’의 선율은 오래전부터 가사가 전달할 수 있는, 그 너머의 낭만적인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가사가 없으니 오히려 만국 공통의 절절함이 아름다운 선율을 타고 가슴에 파고듭니다.
‘나비부인’을 극장에서 만나지 못했더라도, 스토리 라인을 정확히 모르더라도, 그 조용히 깔린 듯 비감 넘치는 음조를 한번 듣게 되었다면 숨죽인 울음처럼 깊은 슬픔이 문득 기억의 뇌리에 인화되게 마련이죠. 이런 인상은 오페라가 거대한 신비와 이상화된 영웅들의 이야기, 신성에 가까운 고결함을 노래하고 있을 것이라는 증빙처럼 보입니다. 어느 날 문득 우연히, 저도 모르게 그 스토리를 알게 되고, 장면과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20세기 초에 쓰인 아침 드라마-아침 드라마를 폄훼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나름의 존재 의의가 분명한 장르죠.-가 있다면, ‘나비부인’의 이야기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사례일 것입니다. 19세기의 나가사키항. 점령군처럼 당당한 기세로 바다가 보이는 항구에서 쾌적한 삶을 누리게 된 미군 장교. 미군 장교와 결혼할 수 있다는 꾐에 빠져 그의 집에서 살게 된 일본 여성. 한쪽은 제대로 꾸려진 결혼이라고 믿고 싶지만, 다른 한쪽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잠시의 놀이.
그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보이게 하려는 만듦새, 유명한 아리아 “어떤 맑은 날”의 가사가 가진 역사적 맥락까지 알게 된다면, 오페라가 가진 ‘고상하고도 이상적인 세계’는 그저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운 아이스크림처럼 눅눅하게 녹아내릴 뿐입니다.
거기에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본 이색적인 동양의 신비, 그네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탐미에의 동경, 그럼에도 여전히 그 본질은 여전히 역사의 추상적인 발전 단계에서 ‘계몽’이라는 것이 필요한 문명으로 바라보고 대하는 모습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나비부인’이 그리는 깊은 슬픔의 공간, 1900년대의 나가사키 항구는 여성들에게, 특히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여성들에게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공간이었습니다. 해가 떨어진 항구의 일꾼들이나 병사들이 조용히 읊조리는 ‘허밍 코러스’는 슬프지만, 동시에 그 슬픔의 깊이만큼이나 잔혹한 울림을 숨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고, 알려하지 않았던 거대한 배경이 담겨 있죠.
한국인이 사랑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어떨까요? 18세기 파리의 코르티잔(Courtesan), 부자 귀족들의 정부로서 경제적 후원을 받으며 살아가는 여성과 젊고 순수한 부르주아 청년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애초 틀거리가 이러한데 아버지 죠르주 제르몽의 아들 사랑은 가부장적인 세계의 여성에 대한 시선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축배의 노래”를 함께 부르지만, 언제든 꾀어내거나 위협해서 내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애초 작곡가 베르디나 원작을 쓴 알렉산드르 뒤마 피스의 의도는, 코르티잔 출신의 여성이지만 지고지순한 사랑과 자기희생을 보여주는 비올레타의 절절함을 세상에 널리 공감하게 하려는 것이었을 테지만, 그저 특정한 목적의 대상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 ‘여성’의 이미지, ‘프로토 타입’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음악의 천재, 아니 음악의 왕, 우리의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로 시선을 옮기면 기함할 만한 에피소드와 사건들이 넘쳐납니다. ‘돈 조반니’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기사장 코멘다토레(Commendatore)의 웅장한 대단원이 마음의 위안을 주기는 하지만, 영국에서 ***명, 프랑스에서 ***명을 과감하게 노래하는 ‘카탈로그의 노래’에 이르러서는 그저 꾐이나 가스라이팅, 폭력의 대상으로서 숫자로 읽히는 여성의 ‘존재’에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기악곡들과 달리 오페라는 언어로 구성되고 당대의 문화의 단면들을 있는 그대로 투시합니다. 말하듯이 노래하는 레치타치보(recitativo)와 서정적인 아리아는 모두 특별한 순간의 감정을 언어를 토대로 토로합니다. 기승전결을 가진 스토리텔링의 장르로서 시대의 살아가는 모습, 인권, 젠더가 그대로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당대의 슬픔, 당대의 기쁨, 당대의 절망, 그 시대에 흔히 만나게 되는 인물들을 노래하는 장르의 특성상 오페라는 당대의 젠더를 보여주는 좋은 리트머스임에 분명합니다
오페라의 클래식이라 불리는 작품들의 면면. 이탈리아 말이라는 벽을 넘어 알게 된 오페라의 세계는, 분명 새로운 관점에서 새롭게 읽어낼 필요가 있는 미지의 바다임이 분명합니다. 소위 ‘성인지 관점’으로 새롭게 읽은 오페라는 적어도 13세기 이후 서양 문화사의 한 단면을 여과 없이 드러냈습니다. 이제 그 긴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