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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Dec 09. 2023

박경리

이름을 찾아서, 문학편 #13 박경리 X  Goya

  만석꾼 살림의 최서희나 나룻배 뱃삯을 선뜻 내놓을 수 없는 박서방이나 눈이 멀어버린 성환할매, 살아보고 싶은 뜻을 잃은 상태는 매일반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평등했다.

「토지 19권 238쪽」, 박경리     


  평등했다. 평등했다. 고통만은 모두에게 평등했다. 살아보고 싶은 뜻을 잃을 정도의, 저마다의 고통 앞에서만은 모두가 평등했다. 언젠가는 박경리 선생의 이야기를 쓸 날이 오기는 할 것이라 막연히 예감했다. 나의 세기에 만난 그의 이름도 이제 조금씩 조금씩 그 색감, 그 온도를 잃어간다. 주변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기억과 의식 속에서마저 색감과 온도는 흐려진 채, 그저 하나의 영광, 하나의 빛, 나보다 이전에 이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거대한 역사, 그 풍경과 공기의 기록에 대한 경의로만 남았다. 이미 박제된 지 오래인 채  어딘가의 일부로 남았을 뿐이다. 박경리 선생이 나에게 그러한지, 토지가 나에게 그러한지 구분조차 모호하다.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는 이는 있어도 간도의 끝 모를 평원을 스쳐 지나가는 먹빛 바람을, 하동의 낯익은 강가로 다시 돌아가는 새들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북으로 북으로 국경을 건너간 사람들을 휘감은 생의 열정과 그만큼의 낙담, 그만큼의 절망, 그만큼의 혼돈을, 지금, 여기의 사람들은 설사 알더라도 몸으로는 기억하지 못한다.

Le Marchand De Marionnettes, Francisco de Goya


  한동안 거의 난폭한 탐독자였던 까닭에 동서고금의 책을 가리지 않고 접했지만, 당시에도 이미 무거운 볼륨이었던 토지를 시작하기란 약간의 결심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서양철학과 문학, 사회학, 약리학, 원자 물리학 등에 빠져있었던 데다 원서 읽기에 정신을 쏟을 무렵이었다. 소문만 무성했던 토지를 처음 들춘 것은, 세로 2단의 판본 시절, 도서관에서도 특별히 낡아 보이는 상태의 단행본에 손이 닿았던 순간이다.


  세로 읽기가 쉬울 리 없었다. 언어조차도 생경했다. 문장은 절도 있고 단정하고 힘 있는데, 사투리 섞인 이전의 말들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 한 권을 반복해서 읽는 패턴에서 빠른 다독자로 넘어가고 있던 시절에 읽히지 않는 책은 작은 고통이었다.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생경함을 지나치지 못했다. 반나절을 버티고 읽고 나니 어투의 흐름이 들어온다. 문장들이 만들어 내는 장면과 그 안의 인물에 감정이 생긴다. 흐름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이고 추운 겨울 아침을 지나쳐 찾아간 열람실에서 하루 여덟 시간 이상을 읽기에 빠져들었다. 흐름을 타고나니 흡인력이 있었다. 세로 2단 따위를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박경리 선생이 여전히 ‘토지 4부’를 연재하고 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만남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겪고 느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날의 감정에 가장 가까운 경험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처음 원서로 접했을 때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의 마을을 휩쓰는 역사의 파도 앞에서 솟구치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공기는, 아일랜드의 그것과 간도의 그것이 다르지 않았다. 나는 문득 경계를 넘어 멀리까지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A way of Flying) (circa 1815 - 1824), Francisco de Goya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토지 마로니에 판본 13권 359쪽」, 박경리     


  ‘토지 13권’ 속 한복의 말이다. 한복이 어떤 인물인가. 최서희의 부친 최치수를 죽인 아버지와 그로 인해 목숨을 끊은 어머니의 아들이다. 형은 간도로 가더니 일본 순사가 되었다. 한복은 멸망하지 않았다.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웠다. 독립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가 이제는 늙어 “현자의 눈”을 갖게 되었을 때, 그제야 이 한마디를 내뱉는다.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숨이 막힐 겨를도 없는 삶을 살고 살다, 문득 한 마디 내뱉는다. 인생의 거대한 공략을 패시브의 전략으로 온 힘을 다해 살아낸 사람의 한마디다. 작가 박경리 안에 수백, 수천의 자아가 살아가는데, 그중 한 사람, 한복이 독자에게 던진 사랑의 말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말들, 사람을 살릴 말들이 그 안에 있다.


They are Dying (1825–1828), Francisco de Goya


  박경리 선생은 1926년에 충무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작가로 데뷔한 것이 1955년,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1967년이다. 1955년이면 이제 막 지독히도 독한 전쟁이 마무리되었을 무렵이다. 전쟁은 구한말과 일제를 거치며 드러난, 우리 안의 온갖 힘과 세력들의 경합, 아나키즘부터 사회주의,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의 온갖 사상의 경합, 한반도를 둘러싼 온갖 나라들의 경합이 결국 그 모순과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극렬하게 폭발한 비극이었다. 전쟁에 대한 끔찍한 기억은 작가 자신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여러 차례 증언하기도 했다.


  중간중간 시절을 타며 끊기는 시간이 있었지만, 토지의 연재는 1994년 8월 15일까지 이어졌다. 연재한 잡지 만해도 여덟 종류다. 문예지부터 여성지, 시사지를 막론한다. 부침이 많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단행본 역시 출판사가 여러 번 바뀌면서 판본이 많다. 지금의 20권 편재는 2012년 마로니에북스 판본에서 완성되었다. 5부 25편의 체제다. 권마다 400페이지를 넘나 든다. 벽돌책의 호흡을 감당하기 어려운 오늘의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책은 아니다.


The Third of May 1808 (1814), Francisco de Goya


  작가가 이 거대한 이야기를 수십 년의 시간에 걸쳐 정제해 낸 동기가 무엇이었을까를 고심해 본다면 이상현에 대한 작가의 서술이 조금은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모든 불꽃은 다 꺼져버렸고 갈등과 고뇌와 자책감은 가라앉았으며 차디찬 공간에다 이상현이라는 한 사내, 한 피폐한 사내를 놓았을 때 상현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고 그 객관화한 자신을 통하여 타자를 인식할 수 있었다.

「토지 20-1회」, 박경리


  이 담담한 서술은 사람에 대한 지극한 이해와, 신념, 사랑이 없이는 쓰일 수 없다. 박경리 선생 자신이 토지를 쓰면서 그 안에 담은 인간의 삶에서 느낀 미감과 사랑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치열하게 살지 않는 목숨은 없다. 어떠한 미물의 목숨이라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아프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 비극과 희극, 행과 불행, 죽음과 탄생, 만남과 이별, 아름다움과 추악한 것, 환희와 비애, 희망과 절망, 요행과 불운, 그러한 모든 모순을 수용하고 껴안으며 사는 삶은 아름답다. 그리고 삶 그 자체만큼 진실된 것도 없다.

「토지를 쓰던 세월」, 박경리     



  그리고 그 사랑은 결코 말랑한 감성으로 구축되지 않았다. 작가는 극도로 혼란한 시절을 살아낸 선대의 삶에서 근본적인 저항의 힘이 어디에서 왔는지 직시한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혜안과 직관이 없이는 구축할 수 없는 세계다.


  세상 어느 곳에나 있을 평범한 농부들의 고결한 저항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의 존엄을 오랫동안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지 않고서는 존재하지 못할 그 감각을 작가는 조선의 특별한 신분제에서 발견한다. 그것이 누구의 의도였든 농사를 업으로 삼은 계층에까지 인본 유교의 사상이 흘러 내려간 조선 사회의 힘을 직시한다.    


The Forge (circa 1815-1820), Francisco de Goya


“너는 무엇을 했느냐!,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인간, 박경리 단편선(서문문고 234)」, 박경리     


  박경리 선생의 단편 ‘인간’은 혁명기의 탁류를 떠내려가는 사람들의 짧고도 강렬한 이야기를 담았다. 혁명의 초두에 서서 민중을 선동하다 어느덧 파렴치하게 타락한 사포라는 인물은 살아남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그를 끝까지 배반하지 못해 사형대 앞에선 동료에게 외친다. 너는 무엇을 했느냐,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작가는 “혁명의 정리는 현실을 떠난 집념의 악마가 한다.”라고 일갈한다. 무수한 혁명을 겪고, 절망과 희망의 극단적인 낭떠러지에 서본 사람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는 절조다. 노회한 세대의 반동인가, 인간의 역사에 대한 깊은 혜안인가. 그 답은 역시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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