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커 Dec 13. 2023

애거서 크리스티

이름을 찾아서, 문학편 #13 Christy X Kandinsky

  에밀리 디킨슨, 버지니아 울프와 실비아 플라스, 박경리, 토니 모리슨으로 이어지는 이름의 계보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이름은 뭔가 이질적이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오히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름을 찾기 위한 여행에 애거서 크리스티만큼 적절한 작가는 없다.


  셰익스피어를 제외한다면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작가이자 80여 편의 단행본이라는 막강한 볼륨의 작품을 남긴 작가, 그 대부분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데다 상당수가 명작이라 평가받는 작가, 소설과 극본 분야에서 오로지 작가로서의 경력만으로 영국 여왕으로부터 데임 작위를 받은 유일한 작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번역이 이루어진 작가라는 온갖 최고 기록의 와중에 그 이름을 되묻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Fröhlicher Aufstieg (1923) Wassily Kandinsky (Russian, 1866 - 1944)


  애거서 크리스티는 우리가 잘 모르는 최고 기록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까지 알려진 작가임에도, “가장 연구되지 않은 작가”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그의 소위 ‘빨간책(해문판 번역서 시리즈를 말한다.)’을 어린 시절 한 번쯤 만나 보지 않은 이가 없는데,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 연구자들이 애거서 크리스티를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변은 “그가 장르물, 소위 대중적인 추리소설 작가라서”일 것이다. 추리물과 같은 장르문학에 대한 끈질긴 편견이 이어져 온 우리 문단에서조차 이제는 ‘순수문학’이라는 경계가 크게 의심받고 있으니 이런 류의 고정관념이 이유라면 애거서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는 늘어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극히 효율적인 짧은 문장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해 대화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쌓아나가는 스타일 덕분일 수도 있다. 물론 그 대화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 인물의 심리, 관계, 사건 모두를 드러내고 전진시키는 효과적인 ‘대화’의 힘을 보여준다. 애거서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성공한 극본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한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Gewebe (1923) Wassily Kandinsky


  파내고 싶어도 파낼 것이 없는 상태. 그 이름이 너무 많이 알려져서 알고 싶은 흥미를 더하지 않는 작가인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이 가장 가까운 답이든, 유리 상자 안에 놓인 것처럼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정보가 드러나 있는 작가 애거서를 연구하는 학자는, 결국 거의 없다. 흥미로우면서도 아쉬운 일이다.


  애거서의 작품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역시 재한다. 하드 보일드 추리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레이먼드 챈들러는 애거서의 작품들이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을 몹시도 사랑하지만, 그가 금발 여성에 대한 장광설을 두 페이지에 걸쳐 펼쳐내는 것만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챈들러의 ‘현실 세계’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작은 의문은 있다. 


Improvisation Klamm, 1914 (1916) Wassily Kandinsky


천재의 이면     


  애거사가 남긴 80여 편의 추리소설 중에는 「빅포」 같은 미묘한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도 있지만(이상하리만큼 정치적 관계가 얽힌 스파이물에서는 모호하고도 작위적인 결과를 내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쥐덫」처럼 단지 장르적 성취 이상의 문학적 각성과 인간 이해,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보여준 작품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1890년에 태어나고, 26세가 되던 1916년에 첫 추리소설 작품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The Mysterious Affair at Styles)」을 탈고했으니, 1976년 1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년 적어도 한두 권의 단행본을 세상에 내놓은 셈이다.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내면서도, 작품마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캐릭터를 구축하고, 플롯의 구성에 있어서 독창성을 유지했다. 아서 코난 도일 이후 익숙해진 추리물의 기본적인 폼을 유지하면서도 작품마다 개성적인 플롯을 구축했다는 점 역시 놀라운 일이다. 애거서를 천재라 부르는 이들이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애거서는 정규교육을 거의, 사실상 전혀 받지 않았다. 상류층과 중산층의 경계선상에 있던 가정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아버지의 경제적 부침으로 그가 학령기에 달했을 때는 영국의 비싼 퍼블릭 스쿨에 보낼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유명한 이튼 같은 학교는 오늘까지도 여학생을 받고 있지 않다는 점 역시 참작해야 한다.


  그는 독학 전문가였다. 프랑스어에 능통했는데 한때 프랑스에서 지내며 터득한 것이다. 애거서의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온갖 약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 정밀함과 정확함이 영국 약제사회의 칭찬을 받을 정도였는데, 전쟁기에 군인 치료를 위한 자원 간호사로 일하다 과로로 병이나 약제사로 옮겨 근무한 덕분이었다. 스스로 약리학 등을 공부해 자격시험도 패스했다. 워낙 천재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실은 엄청난 책벌레에 극도로 성실한 노력가였다는 증거가 많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기자 이상의 취재력을 발휘해 소설의 자원이 될 방대한 정보를 집요하게 수집하고, 배치하고, 기록을 남긴 성실파 작가다.


  극본을 잘 쓰는 힘은 상류층 가문의 자제답게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문화를 중시하는 환경에서 자라며 무용과 음악, 연극을 고루 배우고 즐긴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노래를 잘해서 본격적인 성악가의 길을 가고자 한때 시도했을 정도였다. 청소년기에 시를 통해 등단할 만큼 문재가 뛰어났다. 


Standing (1930) Wassily Kandinsky


  집을 사랑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마치 함께 세상을 살아가며 나이 드는 것처럼 느껴졌던 인물들, 탐정 에르퀼 푸아로와 그가 항상 그리워하는 친구 아서 헤이스팅스(친구가 많지 않아 보이는 포아로의 까탈스러움을 고려한다면 새삼 놀라운 관계다.), 작가 자신의 분신일지도 모르는 아리아드네 올리버, 인간미 넘치는 경감 제임스 젭을 창조했고,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인 미스 마플 같은 캐릭터를 창조해 낸 창조주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남긴 작품들은 그 자체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를 지난 영국이 전쟁의 암울함을 경험하던 시대의 사회상,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텍스트들이다. 전쟁터로 간 남성들이 비운 자리를 여성 인력들이 대체하고, 심지어 여성들이 군인으로서 전쟁터로 떠나기 시작한 시대를 살아가며 구시대의 사회적 질서가 뒤흔들리는 경험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애거서의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라면 역시 푸아로와 미스 마플이지만, 전쟁 속에서도 생동감 넘치는 건강한 젊은이들이었던 토미와 터펜스 부부 역시 독자들에게 함께 늙고 성장하는 즐거움을 주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다. ‘터펜스(Tuppence, Twopence)’라니 이름 자체가 캐릭터에게 던져 주는 아우라가 대단하다.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대단하지 않아 보이는 이 부부 탐정은 독자들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푸아로 시리즈를 통해 보여준, 영국과 유럽 상류사회의 우아한 세계 속 인간관계, 인물 사이의 미묘한 심리가 불러오는 긴장감 같은 것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무일푼에 가까운 토미와 터펜스가 오랜만에 만나 길거리에서 나누는 경쾌한 수다는 이채로울 수밖에 없다.


Improvisation Flood (1914), Wassily Kandinsky


  푸아로 역시 당대의 전형적인 탐정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 자신을 추리소설에 입문하게 한 중요한 계기였던 셜록 홈스 캐릭터와 어딘가 유사하면서도 거의 반대편에 서있다. 셜록 홈스를 반영웅적으로 비튼 캐릭터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푸아로가 벨기에 사람이라는 설정은 유럽인들의 국가에 대한 의식을 상기시켜 주는 좋은 수단이다. 대체로 배타적인 영국인들에게 우선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피할 수 없는 모욕을 자주 당한다. 프랑스인으로 의심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 벨기에 사람임을 주장하는 푸아로의 행동은 자주 냉소적인 유머의 소재로 사용된다. 영국인들에게 은연중에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프랑스 사람이 아님을 전시하는 대응이자, 국가로서의 이미지가 아직 희박했던 벨기에에 대한 편견에 저항하는 이중적인 대응이다.


  특이한 외모에 다소 퀴어적인 취미와 개성을 지녔으며,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탐정 푸아로로 이미 대성공을 구가한 작가가 미스 마플이라는 심상치 않은 캐릭터를 연이어 창조해 낸 것도 흥미롭다.


  미스 마플로 말하자면, 이보다 이중적이기는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인물이다. 상류 계급의 최하단 정도인 중산층 출신의 마플은 매우 비상한 관찰력과 두뇌를 가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지만, 동네에서 유명한 참견쟁이 할머니다. 마플 캐릭터는 19세기까지의 영국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중요한 사회적인 변화들을 보여준다.


  마플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그 삶이 누추하지 않다. 돈이 될 만한 직업은 없으나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어 보인다. 마플의 삶은 집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집과 가드닝을 빼고는 그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 집은 충심으로 지켜야 할 고국이고, 영토다. 작가에게도 집은 그런 의미였다. 어린 시절에 자라난 집을 지키는데 온 힘을 쏟았고 런던에만 여러 채의 집을 보유하기도 했다. 


  마플 역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면모를 곳곳에서 보이며 때로는 여성 혐오적인 시각마저 드러내지만, 그를 둘러싼 여성 연대의 관계망에서 그 중점에 있다.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치정으로 얽힌 살인 사건에 대한 묘사를 제외한다면, 푸아로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이성애적인 설정이나 묘사, 긴장감, 독자들을 놀라게 하는 잔혹한 폭력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종이 인형의 세계'라고 비판받는 애거서의 작품 전반에서 이런 경향은 드러난다.


Red Spot II (1921) Wassily Kandinsky


  애거서 크리스티의 죽음 이후 발표된 작품, 「커튼 Curtain」은 푸아로 시리즈를 막 내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수십 년 전에 써두었지만, 애거서 자신이 그 발표 시기를 자신이 죽은 이후로 정해 두었다. 작품이 불러올 논란을 예측한 결과이자, 그의 사후 푸아로 시리즈가 악용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조치일 것이다.


  죄와 폭력을 그토록이나 증오했던 푸아로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도저히 그 죄를 증명할 수 없는 범인을 앞두고 내린 결정은, 푸아로 독자들에게는 캐릭터의 비극적인 붕괴로 읽힐지 모르겠다.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방황하는 늙은 탐정의 모습은 깊은 슬픔을 안겨 준다. 살아온 날들 속에서 스스로 저질렀을지 모를 폭력이 남긴 잔상에 몸을 떨며 신에게 온전히 귀의하려는 아로의 모습은 울림을 준다. 그 울림 속에서 독자는 역설적으로 죄와 폭력에 대한 푸아로의 '완전한 증오'를 새롭게 경험한다. 애거서의 깊이는 그런 것이다.

이전 13화 박경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