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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Dec 21. 2023

토니 모리슨

이름을 찾아서, 문학편 Morrison X Schiele

 “I’m poor, I’m black, I may be ugly and can’t cook, a voice say to everything listening. But I’m here.”

  나는 가난하고, 검고, 아마도 못생겼고, 요리도 못하는 여성이자, 귀 기울여 듣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목소리다. 그럼에도 나는 여기 살아있다.

  - 앨리스 워커      


  토니 모리슨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앨리스 워커의 한마디를 문득 소환한다. 앨리스 워커는 토니 모리슨과는 분명히 다른 색깔을 지닌 작가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도 ‘교차성’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교차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이 단 하나일 리 없다는 말이다. 20세기에 직조된 「대한민국헌법」 2장 11조는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고,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애초 차별이 없었다면 선언도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건 역사와 문화는 결국 누군가 겪어낸 차별을 조금씩 지워나가는 과정이었다.


  앨리스 워커가 바라본 세상 속에는 적어도 인종, 성별, 외모, 부의 기준에서 복합적인, 서로 교차하면서 중첩되는, 그래서 더 심화하는 부조리한 차별이 엄연히 존재한다. 흑인으로서, 다시 여성으로서 이중으로 차별받는 삶. 비주류 중의 비주류라는 정체성을 떠안은 삶. 삶은 그 자체로 작가이자 인권 운동가 앨리스 워커를 규정하는 조건이자, 그의 힘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이끌어낸 엔진이었다.


Death and girl (1915) Egon Schiele (Austrian, 1890-1918)


  그렇다. 토니 모리슨의 이름을 다시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19세기와 20세기, 21세기를 관통하는 흑인 커뮤니티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거친 토양 위에서 스스로, 문학의 새로운 길을 닦아낸 흑인 여성 작가들의 강인한 목소리를 소환해야 한다. 헤리엇 윌슨, 토니 모리슨, 앨리스 워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옥타비아 버틀러, 버나딘 에바리스토. 차별의 위계에서 가장 소외되고, 취약한 커뮤니티라 불리는 「흑인, 그리고 여성」의 고단한 삶을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슬픔으로, 때로는 분노조차 사라진 공허함으로 기록한 이름들이다.     


Secession. 49 Ausstellung… (1918) Egon Schiele (Austrian, 1890-1918)


문학의 이름으로      


  토니 모리슨은 제인 오스틴을 읽으며 자랐다. 대학원에서는 버지니아 울프를 연구해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영리하고 재기 발랄한 기질 그대로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한 작가다. 19세기와 20세기 영문학의 중요한 흐름을 열어젖힌 제인 오스틴과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세계는, 소외된 삶을 발견하고 주시하는 「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가능성을 토니 모리슨에게도 전달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흑인들에게도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미국 의회가 인가한 하워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이비리그 명문 코넬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출신학교인 하워드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1964년 남편 헤럴드 모리슨과의 이혼을 계기로 랜덤하우스 지부에서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1967년부터 1983년까지 상당히 긴 시간을 뉴욕 랜덤하우스의 편집자로 일하며 영문학의 최전선에서 비판적 시각으로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크리에이터가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흑인 여성들의 문학에서 문학의 새로운 동력, 새로운 진정성을 발견할 무렵, 토니 모리슨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의 흐름을 체감하고 있었다. 계몽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이성중심주의, 사실주의, 구조주의의 틀을 해체하고 기존의 관습적인 장르로부터, 주류성으로부터 탈출하려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모든 흐름은 토니 모리슨의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70년부터는 소설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가장 푸른 눈(The Bluest eye, 1970), 술라(Sula, 1973년), 솔로몬의 노래(Song of Solomon, 1977), 레시타티프(Recitatif, 1983)를 발표했는데 이 무렵 편집자로서의 경력을 마감하고 학교로 다시 돌아가 교수로 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작가로서의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1987년 이후, 「Beloved Trilogy」라 불리는 작품들을 완성한다.     


Die Hämische (1910) Egon Schiele (Austrian, 1890-1918)


정체성, 나를 주시하는 눈     


  「내 사랑하는 자(Beloved, 1987)」는 토니 모리슨의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 드디어 공동체의 뿌리로 확장되어 나간 작품이라 일컬을 만하다. 이전의 작품들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나지만, 주인공의 개인적인 삶이란 결국 공동체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으며, 흑인 공동체의 역사가 투영된 것임을 온전히  드러낸 작품이다.


  토니 모리슨에게 흑인, 여성으로서 20세기의 미국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표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회의 주류로서 주인공으로서 살아가는 삶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경계선에 놓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마치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자아상을,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과도 같은 상태로 표류할 뿐이다.


  앨리스 워커가 흑인, 여성 앞에 펼쳐지는 일상적인 폭력의 잔혹성을 주시한다면, 토니 모리슨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표류하는 개인과 「흑인 공동체」의 역사적인, 사회문화적인 상호작용을 주시한다. 개인을 지향하는 백인 문화와 흑인 문화의 변별점은 바로, 공동체를 통해 서로 유대하고 치유하는 흑인 공동체의 특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에게 흑인 공동체는 아프리카로부터의 강제 이송과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잔혹했던 노예 제도라는 비극적인 역사의 경험을 공유하는 개인들에게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전하고, 서로의 삶을 묶어 뿌리 깊은 상처를 연대로서 치유하게 하는 힘, 그 자체다. 정체성을 상실하고 파멸해 가는 주인공들에게, 공동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자아를 되찾고 개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그 끊임없이 선대로부터 후대로 이어지는 공동체의 중심에 여성이 있다. 오로지 여성들이야말로 공동체 문화의 전수자이자, 연대를 회복하도록 촉발하는 매개체다. 흑인, 여성의 이중 억압이라는 굴레 속에서 오히려 공동체 문화의 강력한 수호자이자 고통 어린 삶을 회복시키는 구원자로서 여성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려낸 작가가 바로 토니 모리슨이다.


Seated Woman with Bent Knees (Adele Herms) (1917) Egon Schiele (Austrian, 1890-1918)


  지금, 여기의 고통     


  토니 모리슨은 정치적이다. 스스로 정치적임이 당연하다고 믿은 작가다. 오히려 그 반대가 문제적이라 믿었다.


  the work must be political . . . That's a pejorative term in critical circles now, if a work of art has political influence in it, somehow it's tainted. My feeling is just the opposite: if it has none, it is tainted.

  작품은 정치적이어야 한다... (정치적이라는 것은) 비평 그룹 사이에서는 경멸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들은) 예술 작품에 정치적 영향력이 들어가면 오염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느낌은 정반대다. (정치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바로 그것이 오염된 것이다. - 토니 모리슨     


  지금 여기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토니 모리슨이 말하는 ‘공동체로의 복귀’는 부유하는 개인들의 삶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상처를 회복시키는 묘약이지만, 공동체로의 회귀가 탈정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로의 회귀는 정치의 시작이다. 자아의 회복은 주체적인 결정 능력의 회복이다. 공동체란 수많은 자아의 연합과 연결이기에 본질적으로 ‘정치하는 인간’을 전제로 한다.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란 결국 「지금, 여기의 고통」을 발견하고 회복하기 위한 나의 선택과 당신의 선택을 서로에게 설득하는 과정이다. 지금 여기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일상에 숨어든 수많은 폭력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는가? 지금, 여기의 폭력, 불평등, 차별로 인한 인간의 고통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Dead Mother (1910) Egon Schiele (Austrian, 1890-1918)


  고통은 추상적이지 않다. 노예 제도로부터 아이를 지키기 위해 막 태어난 아이를 살해하는 여성, 관속에서 발견된 어린 흑인 소녀... 고통은, 폭력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토니 모리슨에게 문학성과 정치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인간의 고통을 발견하고, 부유하는 삶의 뿌리를 발견하고, 궁극적으로 존재를 치유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하는 것이 문학의 일이라면, 정치의 일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토니 모리슨은 그 자신 흑인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를 끝없이 탐구한 작가이기도 하다. 흑인 공동체의 고유한 리듬, 소리, 음악으로서의 재즈를 사랑했다. 재즈의 나긋한 싱코페이션(syncopation, 당김음)과 격렬한 리듬, 블루 노트를 사랑했다. 그 문장의 호흡이 재즈의 리듬을 닮았다는 의견이 많은데 우연한 것이 아니다. 공동체에 대한 깊은 탐색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한 작가에게는 당연한 것에 가깝다.


  공동체의 뿌리를 찾아 나선 여행 「Beloved Trilogy」는 작가의 재즈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담고 있기도 하다. 1987년에 발표된 1편 「내 사랑하는 자(Beloved)」에 이어, 1992년에는 2편 「재즈(Jazz)」를, 1997년에는 3편 「낙원(Paradise)」을 발표하며 연작의 그 거대한 여정을 마무리한다. 흑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나선 오랜 여정을 통해 자아와 공동체, 세계의 연결성을 탐색하고,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넘어 인간의 삶을 발견한 그의 이름을 여기 새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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